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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3. 27. 18:32

몇몇 에세이들을 읽다가 이제는 정말 에세이 그만 읽자, 하던 참이었다. 실제로 두 편의 에세이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던져버렸다. 사사로운 개인의 신변잡기를 굳이 출판할 필요가 있을까. 일상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성장기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황정은의 「일기」를 집어들었다. 황정은은 다르겠지, 하는 기대가 작용했고 기대만큼 좋았다(다분히 황정은에 대한 호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얇고 작은 이 책에서, 황정은의 일기에서 잡은 단어는 두 개이다. '계속'과 '게으름'. 결국은 하나의 의미일 수 있겠다. 계속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이므로. 이 두 단어는 「일기」에서 다음와 같은 문장 속에 들어가 있다.

그 글(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을 읽으면서, 단념하지 않고 생각을 계속하는 일과 사랑을 계속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생각했다./37

이유를 생각하는 것으로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그저 게으름을 생각할 뿐이다.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72

첫 문장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배려와 책임을 이야기하는 맥락에 놓여있다. 황정은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남이 고통을 겪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애써 찾아내고 그것을 '우애'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서로가 서로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배운 경험을 말한다. 그가 언급한 것 처럼 이러한 생각은 황정아의 글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애써서 계속해 낸 황정은의 태도에 마음이 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지하는 글을 찾아 읽으면서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좋았다.

두 번째 문장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단어는 '게으름'이다. 이 문장 앞에 황정은은 외국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경험한 혐오와 우리 사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현상에 대해 쓰고 있다.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 타인의 삶에 대한 무지,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한 무지, 그 무지를 부추기는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 온갖 형태의 게으름, 온갖 형태의 게으름이란 뭘까, 생각한다. 나를 제자리에 주저 앉히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행동을 굼뜨게 하는 모든 것들.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을 고치고, 삶을 고치고 생각하고 또 고치고, 그러면서 다정을 잃지 않는 삶. 「일기」는 혹은 일기는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좋은 방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정한 것은 이런 것이다. 황정은은 이효리가 동료들에게 고사리 파스타을 만들어 주는 TV방송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난다/164

마지막 두 편 '흔'과 '일기'를 힘들게 읽었다. 다 읽고 나니 바깥공기가 쐬고 싶어져서 뒷 산을 조금 걷다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