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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17. 23:51

이런 글을 좋아한다. 이런 글이란 저자의 언어로 이야기 하자면 '사회학적 자기성찰'(introspection sociologique)에 해당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심리학적 자기성찰적' 글쓰기 보다 사회적 자기성찰적 글쓰기가 나에게 더 설득력을 가진다. 정신분석을 비롯한 심리학적 자기성찰은 나와 인접한 개인들(대부분 가족)과의 관계 안에서 나의 정신적 작동과 그 결과로 빚어지는 행위에 초점을 두는데 따지고 보면, 그 관계라고 하는 것들이 대부분 사회적 압력(혹은 환경)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리학의 연구결과들을 접할 때마다 그 나름의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종종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저자 디디에 에리봉(이름 너무 프랑스스럽다)은 노동계급 출신의 동성애자인 자신의 삶을 사회학적 시각으로 탐사한다. 랭스에서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먼저 부모의 계급과 의식을 추적하면서 해석한다. 

   나는 또 다른 사회적 여정을 따랐는데, 흔히 '계급 탈주자(transfuges de classe)라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여정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탈주자' 중 하나였다. 그러한 이들은 거의 반영구적인 동시에 의식적으로 자신의 출신 계급에 거리를 두고, 자신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관심을 쏟기 마련이다. 27 

나는 부모님과 같이 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부리해내야 했다. 66

저자가 노동계급의 부모로 부터 벗어나고자 채택한 것은 공부였다. 그리고 공부는 그의 욕망을 은폐하는 기능으로 작용하였다.

나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책에서 얻은 개념이었고 추상적인 관념이었다. 부모님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 '소외적 노동자'와 '계급의식'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개탄하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진실은 이 '혁명에 입각한' 정치적 판단이 내가 부모님과 가족에 대해 내리는 사회적 판단과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 욕망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날의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사회적인 탈동일시의 벡터였다. 실제의 노동자들에게서 더 잘 멀어지기 위해 '노동 계급'을 예찬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트로츠기를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를 인민의 아방가르드라고 믿었다. 사실 나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읽을 여유가 있는 특권층의 세계와 그들의 시간성에, 그들의 주체와 양식 속에 들어갔을 따름이다. ....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 세계로 부터, 부모님의 세계로 부터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물론 내가 그들 자신보다도 그들의 삶을 훨씬 더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99-100.

가족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선택과 개인적인 노력으로 디디에 에리봉은 대학에 진학하지만, 학위를 받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학위는 우리가 사회관계자본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또 졸업장을 전문직으로 다시 전환하는 전략에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다른 가치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는 너무도 명확한 진실이어서 시간을 들여 입증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족과 친지의 도움이나 친분관계, 인적 네트워크 등이 모두 노동시장에서 학위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회관계자본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사회관계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내 학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어쨌든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221.

에필로그를 뺀 마지막 5부는 동성애자인 저자의 섹슈얼리티의 분석에 해당하는 글인데, 계급적 출신 배경을 분석한 4부까지의 글이 더 흥미로웠다. 프랑스라는 사회문화적 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급에 관한 글은 현재의 한국사회와 그 안에서 내가 느낀 것들과 유사한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저자가 몸 담았던 노동계급, 저자의 지평을 제약하는 노동자적 환경을 혐오하며 '부르주아'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그들과 동질한 의식을 갖지 못하는데서 오는 분열 같은 것은 지금의 나와도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방식의 회고록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대한 각색과 과장이 아닌, 나의 삶을 사회적 맥락에서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자기 에 관한 쓰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