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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4. 24. 20:18

작가가 후기에도 썼는데, 조심조심 읽게 되는 책이다. '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에 누가 될까 싶어 책이 출간되고도 작가로 나서서 말할 기회를 갖지 않았'다는 작가의 후기를 읽고, 읽는 내내 조심하는 마음이 든 이유도 그 때문이겠구나 싶었다. 아주 아주 힘들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은교씨와 무재씨가 서로에 대해 갖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조심스러운 마음 조차 서로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따뜻한 마음이 그러그러한 수사가 아니라 실체로 나타나면 은교씨와 무재씨가 서로에 갖는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숲에서 길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섬에서 다시 길을 잃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이난다. 첫 장면에서도 은교씨와 무재씨는 서로를 의지해 길을 찾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불빛이 보이는 마을을 향해 걷는다.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 그림자가 그들을 따르게 한다.

무재씨. 걸어갈까요? .... 걸어갑시다, 하며 손을 당기자 별다른 저항없이 걷기 시작했다. 한줌 손에 이끌려오는 무게가 묵직한 듯 가벼워서 나는 쓸쓸했다.....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속에 덩그러니 차가 남아 있었다. 그림자 하나가 그 곁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거리가 상당한 데다 어둠으로 바닥이 지워서 무재씨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갸름한 덩어리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처럼 서 있다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완만한 고개에 올라서자 멀리 떨어진 곳에 가로등이 보였다......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은교씨.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182-185

이 작품에서 세상의 폭력은 주로 종로 전자상가의 재개발로 표현되는데 어떤 장면에서 무재씨가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은교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서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159

결국은 이런 이야기를 황정은이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로 고달프고 허망한 삶을 사는 사람들, 그것을 강요하는 세상. 그리고 세상에서 지쳐가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한발짝씩 불빛을 향해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은교씨와 무재씨의 이야기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고, 큰 목소리로 화이팅을 외치기 보다 은교씨가 무재씨에게 했던 것 처럼 조용히 '괜찮아요, 괜찮아'하며 등을 쓸어 주는 편을 택하게 된다.

2010년의 작품을 2022년에 다시 읽는다. 그동안 세상이 더 나아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그래도 <다시 쓰는 작가 후기>에서 황정은이 썼듯이 '조심하는 마음'을 단념하지 않은 탓에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득, 그 조심하는 마음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심하는 마음. 조심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