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9

디디의 우산(2nd)

지난 주 독서모임에서 황정은의 《연년세세》를 함께 읽었다. 《디디의 우산》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들었다. 공교롭게도 책장을 덮은 오늘 윤석열 탄핵 선고가 있었다. 《디디의 우산》은 박근혜 탁핵 선고 장면으로 끝이 난다. 2020년에 쓴 글을 읽어보니 를 그다지 좋게 읽지는 않았다. 객관적 사실과 허구를 오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읽으니 작가가 왜 그런 형식을 취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혁명이라 하는 것이 일어났으나, 아직 삶의 곳곳에 도래하지 않은 미완의 과제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 墨字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혁명.오늘, 누군가는 헌재의 탄핵 인용결과를 들으며 통곡을 하고, 누군가는 춤을 추었다. 나또한 당연한 결과인데도 울컥했다. ..

between pages 2025.04.04

계속해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다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며칠째 눈에 보이는 곳에 꺼내두고 있었다. 첫번째 읽고 쓴 글에는 ' 아, 참 사랑스럽다'라고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적었다. 다시 읽은 느낌을 말하자면 '조용한, 겨울밤에 눈이 내리는 것 같은 글' 같다. 무슨 뜻인가. 그냥 분위기가 그렇다. 소라, 나나, 나기. 소란스럽지 않은 인물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자기 몫의 삶을 계속한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조용조용한 삶, 그러면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삶.나는 왜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었을까. 잘 모르겠는데, 만두 빚는 장면을 다시 읽고 싶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세속적인 장면, 그래서 귀하고 행복하게 느꼈던 장면이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그 장면은 따뜻했다. 이 번에 ..

between pages 2024.10.29

百의 그림자

작가가 후기에도 썼는데, 조심조심 읽게 되는 책이다. '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에 누가 될까 싶어 책이 출간되고도 작가로 나서서 말할 기회를 갖지 않았'다는 작가의 후기를 읽고, 읽는 내내 조심하는 마음이 든 이유도 그 때문이겠구나 싶었다. 아주 아주 힘들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은교씨와 무재씨가 서로에 대해 갖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조심스러운 마음 조차 서로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따뜻한 마음이 그러그러한 수사가 아니라 실체로 나타나면 은교씨와 무재씨가 서로에 갖는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숲에서 길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섬에서 다시 길을 잃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이난다. 첫 장면에서도 은교씨와 무재씨는 서로를 의지해 길을 찾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두 사람은..

between pages 2022.04.24

일기

몇몇 에세이들을 읽다가 이제는 정말 에세이 그만 읽자, 하던 참이었다. 실제로 두 편의 에세이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던져버렸다. 사사로운 개인의 신변잡기를 굳이 출판할 필요가 있을까. 일상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성장기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황정은의 「일기」를 집어들었다. 황정은은 다르겠지, 하는 기대가 작용했고 기대만큼 좋았다(다분히 황정은에 대한 호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얇고 작은 이 책에서, 황정은의 일기에서 잡은 단어는 두 개이다. '계속'과 '게으름'. 결국은 하나의 의미일 수 있겠다. 계속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이므로. 이 두 단어는 「일기」에서 다음와 같은 문장 속에 들어가 있다. 그 글(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을 읽으면..

between pages 2022.03.27

연년세세 年年歲歲

한 번 읽고, 또 이어서 한 번 더 읽었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기는 처음이다. 한영진의 이야기를 다룬 에 조금 감정이입이 되었다. 포스트 잇이 붙혀진 곳도 이다. 엄마의 사물들과 엄마의 짜증을 감당했다(50). 엄마의 사물들...'엄마의 짜증'보다는 '엄마의 사물들'에 눈이 콕 박혔다.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 거기서 오는 답답함을 작가가 정확하게 안다고 느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생각을 못했던 것인데, 두번째 을 다 읽어갈 무렵 한영진과 한세진의 엄마가 아니라, 순자로 불렸던 이순일 개인의 이야기를 작가가 하는구나 느꼈다. 한세진과 한영진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 이야기로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이야기(133). 그러나 에 비해 그냥 타인의 이야기로 읽..

between pages 2020.11.17

계속해보겠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 참 사랑스럽다'였다. 무엇이? 일단,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모두 좋았다. 소라, 나나, 나기, 그리고 애자와 순자까지. 이들은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저마다의 상처와 저마다와 고충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세상에 휩쓸려 자신을 해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애자를 제외하고...그런데 애자의 선택도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잠잠한 태도로 그들은 서로를 지키며 다독거린다. 그 잠잠함은 소라, 나나, 나기가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단호함이기도 한데, 이 단호함은 과격하거나 돌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다. 어쩌면 세 주인공들의 따뜻함의 근원은 순자인지도 모르겠다. 순자는 가장 평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표준과는 거리..

between pages 2020.11.07

야만적인 앨리스씨

아, 뭐라고 써야할까. 생각나는 나는 것은 '씨발됨'. 엘리시어의 모친이 자신의 아들을 구타할 때,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변하는 시점을 엘리시어는 '씨발됨'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40). ....참지 못한다기보다는 참기가 단지 싫은 것이다. 때려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내면에 쌓는 일이 귀찮고 구차해 이것도 저것도 마다하고 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다.(41). 누구든 마음에 '씨발됨'의 씨앗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이야기는 씨발됨을 발생시키는 씨발된 상황과 씨발된 상황에서 차츰 씨발년/놈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between pages 2020.11.03

파씨의 입문 & 아무도 아닌

소설을 읽으면 확실히 마음이 가라앉는다.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다르다. 직접적인 학습(?)이 이루어지는 에세이와 달리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이게 뭔가, 멍한 기분이 들고 삶에서 내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있는 것이(물론 그것이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황정은에게 왜 끌렸는지 모르겠다. 을 어렵고 힘들게 읽었던 터라 다시 그녀의 글을 읽겠는가 싶었는데 신간 가 나왔다. 신간을 읽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전작들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소설집 2권(아무도 아닌 & 파씨의 입문)과 장편소설 2권(야만적인 엘리스씨 & 계속해보겠습니다)을 구입했다. 책이 출간된 시점을 보니, 내가 읽지도 쓰지도 않고 먹고사니즘에 지쳐 영혼을 갉아먹고 있던 기간이다. 이렇게 오래 꾸준히 쓴 ..

between pages 2020.11.01

디디의 우산

이 책은....,소설로 보자면, 첫번째 글 가 보다 좋았다. 작년에 읽다가 중단하고 를 다시 읽었는데 작가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와 작품에 대한 평단의 해석이 없었다면(접하지 않았다면) 더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보태기가 어려운 작품이지만, 이 글에서 단연 마음을 잡아 끈 문장은 d의 주인집 할머니 김귀자의 독백이다. 조롱박, 아직 어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한 박이.....희고도 파랗게 그것이 어찌나 예뻤는지 손으로 쥐었다가 땄지. 내가 그것을 뚝 땄을 적에는 반드시 먹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게 다만 탐스럽게 예뻐서, 십여개 열린 것 중에 한개를 쥐고 넝쿨에서 뚝 떼어낸 거야. 그랬더니 그 집 여편네가 벼락같이 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 박을 따지 말라고..

between pages 20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