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2nd story
between pages
diary
with others
film
my work
T.P
office
feminism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08. 2. 17. 01:00

성실한 사회주의자 비즐러, 유능한 정보원으로서  타인의 삶을 관찰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닐진대 그 무수한 타인들의 삶을 무사히(?) 통과해온 그가 어찌하여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앞에서 멈칫한 것일까? 앞서 관찰한 타인들의 삶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것만 못해서? 영화에서 이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얻을 수 있는 장면은 없다. 그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지켜보면서 변해가는 비즐러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 해석은 내 맘대로.^^

고독
나는 소위 예술하는 사람들한테 묘한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낀다. 두드러진 표현도구를 갖고 있어서 그런가, 그들은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자기 앞의 생을 다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을 유지하며 굳어가는 사람들보다 매일매일 자신의 내면을 창조하면서 그것을 외부로 끌어내는 사람들은 훨씬 파워풀하고 리치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착각이래도)이 든다. 그래서 성실한 사회주의자 비즐러가 드라이만에게 느꼈던 것도 이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열등감이라고 하기 뭣하면 동경이나 부러움이라고 해도 좋겠다. 자신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비즐러는 우울과 설레임을 동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비즐러의 규범적인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는 비로서 자신의 고독을 '인식'한다. 드라이만을 만나기 전에도 비즐러는 늘 고독했으나 그것이 스스로에게 인식된 적은 없었다. '고독하다'고 느끼면서 이 성실한 사회주의자는 비로소 체제가 요구하는 삶과는 다른, 자신의 내면이 요구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독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고독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으로 부터 고립되거나 소외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영화는 은근하고 끈질기게 사회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제어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인간적 삶이 불가능하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또한 지극히 성실한 사회주의자 비즐러가 브레이트의 詩를 읽는 장면이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듣고 충격 받은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의 내면에서 나와 너를 가르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체제에 구속되어 길들여진 비즐러의 인간성은 이제 체제의 틀을 넘어선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문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다. 비즐러가 그랬듯이 드라이만 또한 HGW XX/7을 통해서 한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즐러를 위한 것임(영화 마지막 대사, no, it's for me)과 동시에 드라이만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통해서,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삶을 통해서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와 만난다. 얼굴을 맞대로 구구절절 그간의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의 삶은 이미 서로에게 닿아있다.

욕망이 넘치는 시대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물이자 자본주의에 맞춤인 인간성을 갖고 있는 우리는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숨 쉰다. 베를린 장벽같은 가시적인 벽도 없다. 그래서인지 자본주의가 우리 내면에 심어 놓은 왜곡된 心象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살게 되지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산다는 착각과 세뇌속에서 타인의 삶을 살기도 한다. 사회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제어하는 것 못지않게 자본주의는 과도한 욕망을 양산해 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주 허위 욕망과 허위 의식에 허덕거린다. 우리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살고자 하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독을 넘어서
이 시대의 넘치는 욕망은 우리를 더 고독하게 한다. 서로 다른 욕망의 지도를 갖고 있는 타인의 존재는 더한 외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비즐러가 그랬듯이 나는 이 지점이 자기 성찰의 기회이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한계와 맞물려 있는 외로움과 고독의 끝까지 나를 밀어붙이다 보면 나와 타인의 경계가 흐릿해 지는 지점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자기 성찰의 결과라고 할수 있는 그런 지점 말이다. 결국, 나의 존재가 나의 내면을 관통하여 타인의 삶에 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소통과 교감과 공감과 더 나아가 연대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여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자, 고독할지어다. 너(나)의 고독이 나(너)에게 닿을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