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죽음을 주제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봤다. <5시 부터 7시까지 클레오>, <이키루>에 이어서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5시 부터 7시까지 클레오>가 다소 관념적으로 죽음을 명상하는 이야기였다면 <이키루>와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는 죽음에 대처하는 삶의 자세랄까 하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남자와 그 남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여자의 다소 충격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안 본 사람 위해서 까놓고 말하자. 췌장암에 걸린 막스는 고통스러운 삶을 연장하느니 죽기를 바라고, 엠마는 스스로 사랑하는 남자의 목을 딴다. '딴다'는 표현이 상스러운가? 원제목이 궁금해서 찾아 봤더니 Emmas Gluck(Emma's Bliss)-'엠마의 축복'이다. 영화는 엠마가 돼지에게 사랑스럽게 입맞추며 돼지의 목을 '따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돼지는 남자로 바뀌고 여자는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의 목에 칼을 댄다. 동물과 인간이 똑같단 말야? 라는 비판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남정현의 말대로 이 영화에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의 경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다. 생명이 있는 것의 숭고함, 그 안으로 이들은 모두 융해된다. 최미애의 탁견에 의하면, 엠마가 죽음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는 엠마가 그들을 가장 잘 '알고'있는 존재이며 또한 동시에 자연과 매우 친숙한 관계에 있는, 문명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서 나온다. 방현철 또한 엠마의 행위를 '사랑과 우정이 개입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 목을 따는 공포스러운 장면이 그다지 끔찍스럽게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엠마가 막스에게 가졌던 이러한 마음의 자세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말대로 엠마는 자연이 인격화된 존재로 보인다. 홍영숙이 엠마의 영혼을 자유롭고 순수하다고 말한 것도 엠마를 자연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엠마가 처한 가난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독립적인 여성으로 비춰진 것은 그 거침없는 자연적 생명력 덕이다.
함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을 존중하는 방식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듯 했다. 특히 김도현은 자신의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방식에 대해 크게 감명받은 듯 했다. 뻥 좀 크게 쳐서 말하면, 엠마는 자연이 인격화된 존재이고 막스는 그런 엠마의 품 안에서 흠..대지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장면, 엠마의 얼굴에 번지는 평화는 그녀의 행위가 결코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설명될 수 없음을 방증한다. 그 순간의 배경 음악은 또 어찌 그리 편안하고 일상적인 느낌을 주는지. 말 그대로 Bliss!
죽음을 삶의 연장선 속에서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포 이런 것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거, 그럴 수 있을 거 같다는 거 짐작은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막스의 선택은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엠마의 처지에 놓인다면 나는 어떨까? 온갖 도덕과 관습의 굴레 안에 사는 인간으로서 엠마처럼 담백하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에 대하여 심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윤리적 억압 속에 나를 가두느니 온갖 욕을 퍼부어 대면서도 병 수발을 하는 편을 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껏 지켜온 도덕과 윤리의 형태일 것이다. 타인에 대해 내가 윤리적 우위를 점하는 방식. 너의 생명을 존중해. 그래서 나는 너의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어.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에는 정작 '너'가 가진 '너의 생명에 대한 생각'이 빠져있다. '너'를 빼고 너들(타인)에 대한 윤리를 말하는 건 좀 우습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말했는지 모른다(그려~ 잘난 척 좀 할께 =_=;). 타인의 얼굴을 좀 들여다 보라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어떤 고통을 호소하는지를 좀 예민하게 느끼고 그 고통이 나에게도 전염되거든 그의 고통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이다. 레비나스를 불러 오면 엠마의 행위는 타인의 고통에 복종하는 가장 윤리적인 행위로 해석된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만 갇혀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가 막스의 목을 따는 행위는 따라서 죄책감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녀는 윤리적으로 억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스를 떠나 보낸다. 그저 담담한 슬픔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Emma's Bliss라는 제목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이 영화는 결국 그런 물음을 던진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레비나스를 끌어들인 이유는 또 있다. 이봐요 언니들. 내 얼굴에 어린 고통이 안보이나요? 고개 좀 들어서 내 얼굴을 좀 봐요. 그리고 내 고통에 반응 좀 해 봐요. 최미애, 남정현, 홍영숙, 김도현, 방현철, 내가 어떻게 그대들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쓸수 있냐고요. 윤리적 반응을 좀 해 봐요. 그리고 휘리릭~ 가버린 김수정, 육미선 그대들의 도덕성을 물증으로 보여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