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97

풍부한 맛

시댁에 선물로 들어온 와인을 뜯지 않고 방구석에 쌓아놓았길래 형제들끼리 나누어 갖기로 했다. 까르비네쇼비뇽과 멜럿이 있길래, 시누이에게 카르비네쇼비뇽을 건네며, '이거 가지고 가. 이게 더 풍부해' 했더니, '풍부한 맛'이 뭐야? 하고 묻는다. 순간 나도, 풍부한 맛이 뭐지? 풍부한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분명하지 않은 말을 모호하게, 정확한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풍부한 맛이라....정확하게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러니 그 맛을 표현할 길도 없는 거였다. 그저 와인 수업에서 카르비네쇼비뇽이 풍부한 맛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한 번 들었을 뿐이다. 모르고 쓰는 단어는 외국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내가 체험하지 않은..

diary 2020.08.24

수다

한겨레 잉여싸롱을 보다가 네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 수다를 떨어본 지가 언제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눈치도 안보고, 별다른 제약도 없이 편하게 낄낄거리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서로 변박도 줘가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 이른바 수다. 수다를 즐기지 않는 내가 그것을 그리워 할 정도라면, 지금 내가 상당히 경직된 생활을 하고 있거나, 외롭거나 일 것이다. 내 생각을 강요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거나. 조직에서의 의사교류 형태는 딱. 이것이다. 강요하는 사람은 상급자이고, 수용하는 사람은 하급자이다. 개방적 조직이 어쩌구, 수평적 의사소통이 어쩌구 해도 결국 거대 조직의 의사소통 형태는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문가 조직이라고 해도 누가 더 권위가 있느냐..

diary 2015.08.10

잊고 있었던....

아이들을 만났다. H와 J는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면서도, 특별히 어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아서 내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저그런 이야기들을 편하게 나누었는데, 내내 즐겁고 흐믓했다. 헤어지고 오는 길에 그래, 내가 이런 걸 좋아했었지, 하고 잊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무게 잡으면서 올바르고 바람직한 말을 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 그저 아이들이 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함께 이야기 하고, 웃고 하는 일들. H와 J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를 특별히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른이 어려움이 대상이 되는 순간 아이들은 자기를 포장하게 되며 대화는 겉돌기 마련이다. 어려움을 넘어 두려움이 대상이 되는 순간 아이들은 자연..

diary 2014.04.10

그게 현실이잖아

이 말은 모든 논의를 종식시킬 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선택 후에 따르는 찜찜함 혹은 자괴감은 현실적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여, 현실적인 선택이 가져오게 될 결과는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으며 그 악영향은 고스란히 현실적인 선택을 한 당사자들에게 돌아간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은 이후의 현실을 악화시키며 그 현실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교란시키게 된다.

diary 2013.10.11

e-book

* 국민 1인당 평균 독서량 통계가 발표될 때 마다 은근한 자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나의 독서량은 국민 1인당 평균 독서량을 웃도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너~무 책을 안 읽는 것이 조금 한심하고 또 의아했었다. 책을 멀리 한지 꽤 된다. 바빠서, 집중해서 읽을 시간이 없어서...등등 이유는 무수히 많다. 간간히 관심가는 작가들의 책이 출간되면 찾아 읽긴 했지만, 몰입도가 떨어져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책의 내용은 흐릿해 지기 일쑤였다. 뭐를 읽었더라. 책을 안 읽어서 정신이 피폐해졌다는 소리를 농담처럼 했다. 역시 인간은 놀고 먹어야 정신을 살찌울수 있다...뭐 이런 소리를 해가면서. * 기계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지라, 남들이 전자책을 읽는다고 하면, 왠지 좀 생경스럽고 뭔가... 멋이,..

diary 2012.08.12

Pink-code day

사람들이 절망하고 힘들어할 때, 희망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 - 충분히 절망하고 힘들어 할 시간, 그 시간을 견뎌내고 스스로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 견딤과 다시 일어섬의 경험을 갖지 않은 상황에서 희망은 판타지.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 박샘과 생각을 공유함.

diary 2012.06.01

타인은 자신의 거울이므로...

지나가다가 혜민스림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하는 말을 잠깐 들었는데, 뭐였더라..기억은 나지 않지만, 미움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 저 도닦는 소리, 뻔한 말 하고 넘기려는데, 문득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그저 세속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을 해결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나의 내부에 있지 않고 밖에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갈등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미워하고 그를 탓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나를 보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장을 방해하는 방법이다. 미워하고 불편한 대상은 내가 피하고 싶은 나의 어떤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그림자를 보듯 그를 바라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화분님도 이 비슷한 말을 했었지 아마.....

diary 2012.04.22

건성으로 살지 않기

옛날에 이선생님이 "글을 쓰면 건성으로 살지 않게 되요"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었고, 그 말을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꽤 진지하게 썼다. 건성으로 살지 않는 것, 어쨌든 나는 그 한동안 스스로에게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요 몇년...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를 자꾸 대려고 한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돌봐야 하거들. 역할과 책임을 많이 생각하고 존재를 돌보지 않았다. 자부심 대신 얻은 것은 자괴감. 이러다 어디선가 삐끗할 것 같은 불안. 어쩌면 이 또한 나의 고질적인 허위의식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대 이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에 쉽게 적응하고 매몰되는 사람이 아니야. '적절하게' 적응하지 않고 살기가 쉽지 않다. 삼년만에 찾아온 모처럼의 여유 앞에서 건성으로..

diary 2012.02.16

터널 통과하기

나는 고3엄마로서 하는 일이 없다. 늦은 밤에 오는 아이를 마중나갈 뿐이다. 때맞춰 영양식을 해 주지도, 간식을 챙겨주지도 않았다.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타인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작곡공부를 하는 아이는 매일 레슨을 받으러 먼길을 오르내린다. 애시당초 악착같이 열심히 하는 유전자를 부모로 부터 물려받지도 못했고, 그런 환경에 노출된 적도 없어 아이는 늘 해오던 대로 '그럭저럭' 제 일을 한다. 긴장감 없는 나른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다그치고 화를 낸 적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저 아이가 안쓰러워 아무 말 없이 안아주기만 한다. 오늘,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았다. 분명, 아이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보란듯이 아이를 옆에 두고 하는 전화였을 것이다. 나는 무책..

diary 2011.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