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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4. 22:51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중 첫번째 권,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은 머리말에서 영화 <그린 북>의 돈 셜리 박사의 대사를 빌어 글쓰기는 '약자가 품위있게 싸우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글쓰기는 윤리적인 글쓰기인데, 윤리적인 글의 핵심은 존재(소재)를 타자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려면 존재에 대한 글쓰기는 재현 주체와 재현 대상의 권력 관계를 규명하고, 다른 관계 방식을 모색하는 것(15)이어야 한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검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16).

정희진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이 여성은 온 몸으로 글을 쓰는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가 실제로 위와 같은 태도를 일관되게 글에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밑줄을 그을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 수없이 많다.

인간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상대방이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다.(81)

그렇지. 그러나 변화의 질적 퀄리티를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발적 욕구를 전제로하기 때문이다.

연대와 연줄의 차이는 새로움에 있다. 기존의 관계를 활용하는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가. 이것이 차이다.(84)

이런 방식으로 대구적 정의를 내려주는 진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얼마나 명쾌한가.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연대고 뭐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집단적으로 노력하는 일에 주저함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 조직이 만들어지면, 권력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부패해기기 마련이라는...조직은, 연대는 이런 당연한 수순을 밟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여전히 혼자가 편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91).

나에게 다른 사람과 연대하지 않으면서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기 위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읽고 쓰는 일이다. 읽고 쓰면서 나는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근 10년 읽고 쓰는 일을 하지 않는 동안 혹은 읽고 쓰는 일이 되지 않았던 기간 동안 나는 거의 바닥을 쳤다.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다시 숨 쉴 수 있어 다행이다. 어떤 형태로 읽고 쓰는 일을 확장해 나갈 것인가. 앞으로 나의 과제이다.

쉽고 어려움은 영역이나 가치관의 문제이지, 학력의 문제가 아니다.(106).

오랫동안 보편적 언어로 군림한 남성의 언어를 비판적하면서 한 말인데, 이런 혜안이 좋다.

질문 자체가 폭력이인데 답할 필요가 있을까....존재와 행위는 그것이 범죄로 판단될 때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기준도 사회 구성원의 의식에 따라 변화한다.(155).

모든 질문에 대해 질문의 맥락을 따지기 보다, 답을 내려야만 능력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는 생각때문에, 나는 질문의 맥락을 따지기 보다 답을 먼저 내리려는 경향이 있다. 폭력적인 질문, 그래서 질문으로 성립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 다시 되묻기, 그것은 성립이 가능한 말이냐?

대개 치유를 마음의 평화나 감정적 위안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치유는 사고 방식의 근본적 변화, 인간 행동 중 가장 인지적인 과정이다. 종교든 인문학이든 일시적 '부흥회'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이유다.(180).

이런 말은 몸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진술이다. 권김현영의 책 제목처럼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만 치유가 현실화된다.

그동안 건성으로 살지 않기 위해 썼다면, 앞으로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나의 본성에 맞는 삶을 위해서 글을 써 보자.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도 이 과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교양인, 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