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서거 40주년 추모 토론회> 한다고 해서 옛날에 썼던거 조금 고쳐서 줬다. '조금' 고친 부분은 세 번째 문단이다. 레비나스다. 레비나스에게 빠지긴 했나보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그린 영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남미의 민중들에게 ‘체’로 불리기 전의 스물 세 살의 의학도 ‘에르네스토 게바라’에 관한 영화다. 보통의 젊은이가 여행을 통해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가닥을 잡아가는지를, 이 영화는 수려한 남미의 풍광과 함께 보여준다. 영화 전후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스크린에 뜬다. '이 영화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공통된 꿈과 열망을 가지고 함께 길을 간 두 젊은이의 이야기다.'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생화학자 ‘알베르토’와 남미 대륙 대장정에 나선다. 그들의 곁에는 낡아빠진 오토바이 '포데로사'가 있다. 영화는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알베르토의 서른 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사만 있을 뿐이다. 아직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뚜렷한 여행의 목적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일 년이 넘게 지속된 여행의 끝에서 게바라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낸다. 여행 중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그는 어렴풋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가를 가늠하게 된다. 게바라는 길 위에서 성장하고, 의식화된다. 그를 혁명가로 만든 것은 이론이 아니라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광산의 광부와 나병환자와 남미의 가난한 인민들을 통해서 게바라는 '새로운 인류와 만난다'.
영화에는 게바라가 광부의 얼굴과 나병환자의 얼굴과 가난한 인민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게바라가 그들의 고통에 감염되는 듯한 장면이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에르네르토가 ‘체’가 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윤리적 감수성이야 말로 단연, 혁명가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바로 그 감수성이 혁명의 출발이라 말하고 싶다. 안다. 이런 말은 너무 감상적이며 ‘영웅적인 혁명가’로 게바라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통받는 삶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감하다면 무엇으로 운동을, 혁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알고 보면 이런 윤리적 감수성이야 말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동력이다. 평범한 의학도 게바라를 혁명가로 변화시킨 것도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롭다. 거기에 남미의 아름다운 자연과 흥겨운 음악 그리고 혀를 지나치게 빨리 굴려대는 듯한 그들의 언어는 영화를 참 감칠맛 나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고대 잉카 문명의 유적지인 마추피추까지 화면에 담아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여행의 필수품. 이 영화를 통해 볼 때 그것은 돈도 아니고, 비상약도 아닌 '친구'이다. 그래서 알베르토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이 영화가 아직 현존해 있는 알베르토의 늙은 얼굴을 마지막 장면으로 잡아내는 건 그래서 흥미롭고 또 조금 감동적이다.
혁명전사로서 신념에 찬 게바라의 모습을 기대한 사람에게 영화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환자를 돌보는 게바라는 의료봉사를 나선 대학생일 뿐이다. 그러나 휴머니스트가 아닌 혁명가는 얼마나 메마르고 또 위험한가. 당신이 ‘체’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체’를 닮고 싶다면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관습에 길들여진 당신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다듬고 누군가가 당신에게 보내는 고통에 찬 호소에 응답할 일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며 동시에 ‘체’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