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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4. 13:32

모디아노의 <청춘시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연이어 읽었다. <팔월의 일요일들>을 집었다가 모디아노를 계속 읽으면 기분이 좀 쳐질 것 같아서 잠시 멈칫했다. 그 때 떠오른 것이 김혼비.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읽은 것 중에서) 단연, <아무튼, 술>이 최고였다. 마침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가 옆에 있었다.


몇몇 장면에서 여지없이(김혼비니까) 낄낄 거렸고, 몇몇 장면에서는 울컥하고 뭉클했다. 첫번째 울컥은 '맨스플레이에 대한 우리들의 답은 느리고 우아하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야기. 상대의 전력에 상관없이 여자들의 축구를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을 오로지 실력으로 통쾌하게 이겨버린 이야기.


대단한 20분이었다. 우리 모두를 소리 지르게 만든 통쾌한 20분이었고, 여간해서는 앉은 자리에서 꿈쩍 않는 감독님마저 벌떡 일으킨 20분이었다. 내 마음속에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맨스플레인 독을 일부나마 빼내어 준 것 같은 20분이었고, 그래서 어쩐히 한바탕 울고 난 것 같은 후련한 20분이었고, 나를 다시 한번 축구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20분이었다.(68).


두번째 울컥은 '나의 구차하디구차한 첫 그것'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야기. 김혼비가 첫 경기를 뛰는 날의 이야기인데, 평소 시뮬레이션 액션을 좋아하지 않던 김혼비가 피치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얻은 생각들을 적은 부분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그 마음이 부럽고 또 좋았다.


여러모로 좌충우돌 갈팡질팡하느라 미치고 환장하겠는데 그 와중에 축구가 재밌어서 또 미치고 환장하겠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축구가 아닌 건 없다는 것을. 시늉이든 시뮬레이션 액션이든 시늉레이션 액션이든 뭐든, 피치 위에 올라서면 그 모든 게 다 진짜 축구였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 그날의 정강이 상태, 나의 사소한 기분 같은 것들도 고스란히 축구의 한 부분이 되었다.(124).


세번째 울컥은 '우리 여기 다 있다' 의 선출(선수출신)들의 선수시절 폭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승과 상관없이 부상당한 상대선수를 먼저 걱정하고 챙기는 이야기이다. WK리그 경기에서는 우승팀은 그동안 축구경기에서 통상 봐 오던 우승의 순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게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우승한) 현대제철 선수들이 모여든 곳은 피치 위가 아니라 라인 밖, 김나래 선수가 누워 있는 들것 앞이었다. 경기를 뛴 선수들도 상대 팀 선수들과 인사가 끝나자마자 들것 앞으로 우르르 달려왔다. 어떤 선수들은 엄격한 의사 같은 표정으로 부상 상태를 체크하며 의료진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고, 어떤 선수들은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를 건넸고, 어떤 선수들은 울먹이다가 되레 다른 동료들의 위로를 받았다. 이것이 이제 막 챔피언이 된 우승 팀의 경기 종료 후 5분간 이었다. 그 5분 동안 멋들어진 우승 세리머니 하나 없었지만 그 어떤 시즌 피날레보다 화려하고 뜨겁고 서사적이었다.(215)


마지막 네번째 울컥은 신입으로 들어온 강미숙을 보며 김혼비가 느낀 단상을 적은 부분이다. '새해 환영! 새멤버 환영!' 이야기에서 '유니폼 입은 모습이 왠지 좋아 보여서' 축구를 하겠다고 들어온 강미숙은 말한다. "내가 정말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좁은 세상에서 일만 하고 있었구나 싶고, 막 두근두근하더라고." 이 말을 듣고 김혼비는 희망과 쓸쓸함이 섞인 언어로 다음과 같이 쓴다.


무언가를 할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실태를 눈 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때로 운명적인 만남은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부터 과거를 내어놓는다. 생전 처음 가 보는 낯선 장소에서 오랫동안 품어 온 향수나 그리움을 느끼는 역설적인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마음으로 쑥 들어와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어떤 감정을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는 그리움. 아마도 그 감정이 깊은 잠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묻혀 버리기 이전의 세월에 대한 향수. 어쩌면 회한.(237-237).


김혼비의 매력은 이것이지 않을까. 유쾌하고 재미있는데, 낄낄거리다보면 무방비 상태에서 사람을 확, 울컥하게 만든다.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데 그 자연스러움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서 좋다. 그래서 이 책은 여자들이 축구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즐겁게 놀 줄 아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김혼비의 다음 책 <전국축제자랑>도 기대된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민음사, 2018. 2019년 1판 6쇄본으로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