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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25. 17:21

4. 「낭만주의의 뿌리」(2021), 이사야 벌린/ 이 모든 것의 기원
- 계몽주의의 보편타당성 혹은 정상성이 힘을 잃는 자리에 낭만주의,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과거로 이끄는 일종의 무의식
- 문제: 낭만주의 운동은 서구 세계의 삶과 사유를 이루는 "지배적 모형"에 심대한 균열을 일으켰..."낭만주의의 위대한 성취는 인간사 대부분의 다른 위대한 운동과 달리 우리의 특정 가치들을 매우 심원한 수준에서 변모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서구 세계의 사상적 전통을 지배해 온 특정 가치들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낭만주의는 그런 가치들에 대해서 어떤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훈계하는 조랑말, 계몽주의 vs 분노하는 호랑이, 낭만주의(만물의 안정적인 구조라는 바로 그 생각을 폭파하는). 계몽주의 시대에는 보편적 지식이 덕이었지만, 낭만주의 운동 이후로는 자기에 대한 진실성 혹은 진정성이 그 자체로 덕이 된다. 보편타당한 앎이 아니라 자신의 특수한 감정에 대한 충실성, 자기만의 고유한 삶에 대한 진정성, 자아의 독특한 창조성 등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부상한 것이다...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적 이상들이 양립 불가능한 상황...타협과 관용을 추구해야 한다...그래서 양립 불가능한 것들을 다시금 양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낭만주의 이후의 사상적 과제였다...계몽이든 낭만이든 모든 좋은 것은 언제든 나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 따라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직시하는 것, 그 분열됨에 머물러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문제: 어째서 낭만주의와 더불어 우리는 정치적 개념의 보편적 동일성이 사라진 세계에 거주하게 되었는가?...이른바 대중 또는 다중이 공론장에 대거 출현하면서 정치적 개념은 낭만적인 대중에 의해 끊임없이 오염되고 왜곡되며 다시 쓰인다. 
-"낭만주의는 결국 개인의 불굴의 의지, 개인의 신념과 이상을 강조하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타인의 의지를 인정하고 타협할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인류는 타인의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상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바로 이 관용과 이해의 정신이다."
-오늘의 과학적 교양이 지식이 아니라 태도, 즉 "함부로 믿지 않고 질문하는 것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by 이정모.
- "철학의 목표는 언제나 같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어둠 속이 아니라 열린 공간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5. 「모든 것은 빛난다」(2913), 휴버트 그레이퍼스 & 숀 켈리/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건너기
-문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울증적 쾌락"에 빠져있다. 소소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있는 일도 하지 못하는 허무하고 무기력한 상태. 온전한 자율성과 진정성을 누리고자 하는 근대인의 열망이 어째서 허무주의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가....의미있게 사는 법을 모르는 데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의미 있게 산다는 과제에 대해 충분히 오래도록 초점을 맞출 수 없다는 데 있다...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실존에 부가되는 다양한 형태의 유혹들, 즉 정신 이탈증, 주의 산만함, TV, 고독, 마약, 섹스, 인터넷과 맞서 싸울 뿐 아니라 그것들과 멀어져서 자신의 권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권태의 바다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영웅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선택을 할 때 충분히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면, 아마 여러분은 상황을 달리 보기를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의 자아가 선택의 부담을 많이 가지게 될수록 선택의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된다. 그런 까닭에 개인주의의 시대가 부당할수록 그 이면에는 각종 심리적 문제들 또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 그 많고 많은 심리학서와 에세이 문학이 번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신과 공동체가 부담했던 것들이 모조리 자율적 개인에게 떠맡겨지기 때문이다. 
-대안: 상황 자체에 부응하는 행동...반짝이는 상황적 순간에 집중하고 그에 반응해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것...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허무함의 감각과는 완전히 다른 실존적 경험을 하는 것...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조들에 맞추어 사는 것을 더 탁월한 삶을 여겼다....그리스 신화 언급하면서 그들의 시시각각의 변화는 우연이 아니라 신의 개입이며 이런 감사와 겨외를 통해 지속적인 경이감 속에서 세계의 의미를 붙잡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끝없이 공명하는 삶의 태도"...자아중심주의와 개인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한, 모든 것의 의미에서 '나'가 중심이 되는 한, 우리는 결국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허무함의 감각이란 자기를 넘어선 상황과 세계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자아 내부로 폐쇄된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허무주의는 세계와 공명하는 법을 잊어버린 삶인 셈이다. 
-공명, 반짝임, 퓌지스의 특이한 경험과 몰입 그리고 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정치적 이해와 결합하는 또다른 경험이 필요...열광과 환희의 순간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라는 빛을 던져 줄 때, 그 빛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의 경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빛남의 윤리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심으로서의 인간적 연대"...민주주의 정치란 그런 의견의 불협화음 속에서 우리의 정치를 발견하고 또 갱신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삶에 기여하려는 정치라는 경험.
 
6. 「사람, 장소, 환대」(2015) 김현경/ 환대의 한계 지점
-문제: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도 환대할 수 있을까?...이 문제를 사적 환대가 아니라 사회가 제공하는 공적인 환대로 변형하고 인류의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로 까지 논의를 확장한다.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환대 없이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사회가 성립될 수도 없는 셈이다...우리를 사람대접 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환대는 특별히 더 도적적이거나 더 따뜻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라, 공간과 도시에 대한 공적인 접근권을 개방하는 문제이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적의 없음을 드러내는 작은 몸짓이자 시민적 도덕에 가깝다....누구도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는 품위있는 사회
-공적인 환대의 무조건적 토대를 지탱하고 실제적인 효과를 감당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공적인 환대는 무조건적인 개방과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라는 경계 자체를 부단히 재구성하는 정치적 협상과 타협의 문제에 가깝다.
- 환대가 공공성의 중립적인 문제로 남을 때 환대는 오히려 무책임한 것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예를 들면,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나의 시간, 체력, 편리 등 내가 가진 것을 놓고 조정할 준비가 없다면, 누구에게나 쉬운 환대가 아니라 내게 어려운 환대를 몸소 감당할 마음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환대는 불가능하다. 환대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재구조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지하철에서 우리의 불편함을 책임있게 감당하는 일.
-환대의 걸림돌: 정체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일에만 매몰되고 정작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나 집단의 환대를 감당하는 일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 태도
-절대적 환대를 꿈꾸기 보다 제한된 환대 위에 서 있다는 분명한 인식, 경계의 희생자에 대한 주목, 그리고 그 제한된 환대를 확장하려는 마음이 긴요하다. 
-누가 배제되고, 누가 포함되는가....낯선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여기는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