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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31. 14:08

서론 격에 해당하는 '매니페스토: 생각의 시체를 묻으로 왔다'와 본격적인 논어 에세이를 시작하기 전에 논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1장 '침묵의 함성을 들어라'를 읽을 때 오랜 만에 가슴이 뛰었다. 공부를 놓은지 오래 되었지만, 어떤 분야이건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해주는 책은 적잖은 흥분을 준다. 가만보면 나는 공부에 대한 태도 혹은 방법을 안내하는 글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고전이 담고 있는 생각은 현대의 맥락과는 사뭇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기에 서먹하고, 그 서먹함이야말로 우리를 타성의 늪으로부터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준다.....콘텍스트가 주는 경관을 주시하며 생각의 무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인간의 근본 문제와 고투했던 과거의 흔적이 역사적 맥락이라는 매개를 거쳐 서먹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오래전 죽었던 생각이 부활하는 사상사적 모멘트이다.(17).

고전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공부를 하려면 텍스트를 독해할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수성은 텍스트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공백과 침묵을 구태어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고전에 숨겨진 공백과 침묵은 당대의 질서를 비튼 의사표현일 수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텍스트의 공백과 침묵을 드러낼 때 발상의 전환이 가능하다. 고전 읽기의 감수성은 이렇게 길러진다. 한마디로 정신집중. 이것이 1장의 요약이며, 아마도 이러한 태도로 김영민은 <논어>를 읽어낸 것 같다. 이어서 나올 논어 프로젝트의 결과물들, 논어 번역 비평, 논어 해석, 논어 새 번역들이 궁금하다.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공부라는 걸 좀 해볼테다.

논어의 중심 개념을 해석하는 내용 중 마음을 끈 것은 '無爲'였다. 현재의 마음상태를 반영한 탓이겠다.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질 것이고,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은 무위의 상태가 규범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임을 비교적 분명히 말하고 있다....이 구절은 마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령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행해진 것임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189).

이 해석에 대해 김영민은 T.S. 엘리엇의 표현을 빌어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0년 이상 해온 일을 서서히 정리하는 시점에서 내가 어떤 스탠스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 얻은 것 같다.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 아주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 그 무엇인가는 반드시 규범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 이 문장 하나도 이 책은 충분히 나에게 몫을 했다.

<아침에는 죽음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요상한 제목으로 김영민을 처음 만났더랬다. 좋았다. 그가 이번에는 고전 텍스트를 앞에두고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핏 겸손해 보이는 제목 이면에는 고전에 대한 공부를 대충하지 말라는 따끔한 언명이 담겨있다. 다음 시리즈들이 기대된다.

 

 

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20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