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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4. 22:05

홀로-함께-떠나보냄-바깥. '홀로'와 '함께'에 실린 글들을 가장 잘 읽었다. '홀로' 챕터에 실린 글은 고립과 고독을 아슬아슬에게 넘나들고 있는 저자의 실상을 적은 글인데, 혼자인 저자의 상황들이 위태로와 보이기는 커녕 부럽기만 했다. 나도 저자의 친구처럼 잠시 벗어난 시간과 혼자있는 시간을, 쉴 시간과 빈 시간을, 고독과 고립을 헷갈리고 있다(17)고 해도 말이다. 부러움의 최고봉은 바로 이 문장들,

나는 혼자 산다. 내가 모든 가구를 직접 고르고 모든 그림을 직접 걸고, 모든 잡동사니를 정확히 내가 원하는 위치에 두고 있는 집에서(16). 

생활규칙을 알아서 정하고, 내 취향을 맘껏 탐닉할 자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하고도 소통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의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설계자라는 사실이 안겨주는 주기적인 작은 성취감.(43).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는 부분은 책을 읽을 당시 마음의 상태와 정확히 비례한다. 혼자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욕구는 여전하다. 어떻게든 나는 이 욕구를 해소해야 한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내가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집은 정신분석에서 자아를 나타낸다고 했던가. 지난 상담의 과정을 돌이켜 보건대 내가 나대로 편안해 질 수 있다면 공간에 대한 거의 집착에 가까운 욕구도 조금은 덜해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나의 공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 이 책은 감정을 들여다 보는 것이 나 자신으로 사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 상담일기를 다시 살펴보니, 이와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아버지의 3주기 기일...어머니의 2주기...이전에는 그분들의 부재를 구체적으로 상기시키는 일이 다가올 때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다. 음울하게 틀어박혔다. 슬픔의 가장자리에 가서 부딪치기만 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직면하는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슬프다. 하지만 스스로가 용감하다고 느낀다. 애도와 명료함. 나는 감정을 느끼는 채로 다시 한 번 애도하는 중이다.(156). 

그때 그때의 감정에 직면해서 내가 어떤 때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살피는 일, 느낌을 정확히 포착하는 일을 연습해 보자. 그때 그때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알고 그 감정을 모두 다 충분히 써버리는 것.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감정에 집중해 보면 뭔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영민함을 만난 문장,

만약 정상이라는 것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면,(175)--정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 마음에 드는 해석이다. 하나의 표준에 맞춰 평가적으로 '정상'의 의미를 찾는 대신에 자신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을 '정상'이라고 하는 것은 비교와 우월을 가리는 잣대를 버리는 것이다.

저자의 오랜 상처와 괴로움, 성숙의 문장,

우리는 각자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실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192)

나는 여전히 '남몰래'가 아니라, 엄마에게 대놓고 화를 낸다. 저자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육성테이프를 들어며 가장 아픈 모서리가 깍여나가듯한 체험을 했듯이 언젠가 나도 스르르 화가 사라지는 체험을 하길 바란다.

이 책을 정리하다 보니, 나의 두가지 과제가 분명해 진다. 첫번째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하는 일과 두번째는 그 결과로 엄마(를 비롯한 타인들)에 대한 화가 제 스스로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 리뷰를 쓰다보니 새삼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책에 크게 공감하는지를 알 것 같다.

*옮긴이의 말이 이렇게 설득력있고 호들갑스러운(좋은 의미로) 것은 처음.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김명남, 바다출판사, 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