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읽고 쓰는 것'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삶을 정교하게 정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앎이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콕, 나를 짚어서 말하는 것 같았다. 책 곳곳에서는 이렇게 솔직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성찰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정희진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는가에 주목하기 보다는 삶에 대한 그녀의 관점에 더 많이 매료되었다. 지적인 허영만 가지고 읽기를 계속할 수 없고, 글을 '지식만으로' 쓸수도 없다. 자기 위치에 대한 '정치적 자각', '정희진 처럼 읽기'의 전제는 바로 이것이다.
줄 친 문장 가운데 특히 두 가지의 내용이 반복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하나는 공부하는 것의 의미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다.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231).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278).
학위를 받고도 마음이 찜찜했다. 학계에 길이 남을 논문을 쓸 생각도 능력도 없었으나, 너무 성급하게 마무리한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찜찜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뒤늦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애를 썼지만 '~ 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그 사람의 지적정체성을 말해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치열함이 없는 성격은 그대로 공부하는 태도에도 나타났다. 나는 늘 비난 받지 않을 선에서 평균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러니 '견해'를 갖기가 어려웠고, 공부한 것이 삶에 녹아들지도 않았다. 이 책의 부제는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이다. 어떻게 읽어야 책이 몸을 통과하는가. 어쨌든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퇴근 후 집중적으로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이해 관계든 진실한 관계든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77).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는 누군가가 '끝냈다'고 생각한다. 왜 나를 때릴까?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내가 아닌 그(그녀)지? 이건 우문도, 문장도, 질문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담론이다(95).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257).
조직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나이듦에서 오는 위기감, 치고 올라오는 젊은 후배들. 이 세상 가장 센 권력은 젊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나는 일 잘하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그런 평가를 받고자 했다는 것이다. 어느 한 때 나는 이 조직의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런 과거가 나를 억압하는 것을 느낀다. 그 댓가를 치러야 하는 시기도 올 것이다. 생존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때다. 과거와 헤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인간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이유없이 멀어진 관계에 대한 미안함, 부채감 그리고 안절부절 같은 것이 다소 사그러들었다. 인간관계에도 '자연(自然)'이 적용된다. 애달파하지도 당연해하지도 않으면서 멀어지는 혹은 끝나는 관계를 받아들여야겠다.
줄 친 문장들...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교양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