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점심을 먹으면서 k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잠자고 있던 감각이 깨어나서 아주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디 음식 뿐이겠는가.
영화에서 미도리는 두 번 이런 말을 한다 -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직 너무 많아.' 나는 이 대사가 참 맘에 들었다. 그 정도의 나이엔 산전수전 다 겪은 얼굴로 짐짓 초탈한 듯이 '세상에는 더 이상 나를 흥분시킬 만한 게 없어'하기 십상인데 말이다. 세상에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말은 묘한 위안이 된다. 맛있는 음식이 감각을 살아나게 하듯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것들이 어느 순간 나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여 나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기대가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일어났다. 올 초에 세운 계획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안 해 본 것을 하고 살자!' 사치이는 이것을 조금 겸손하게 표현한다 - '단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뿐이예요.'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자들은 지금까지 안 해 본 것들을 하고 살기 시작한다. 구구하고 절절한 사연은 알수 없으나 사치에는 연고도 없이 필란드에 이주해 일본 식당을 한다. 한 달째 손님이 없는데도 핀란드 식으로 메뉴를 바꾸지 않는다. 엄청난 사명감이나 결연한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긴 이것보다 더 큰 고집이나 의지가 있으랴만은. 미도리는 문득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펴 놓고 아무 곳이나 찍어서 핀란드로 목적도 없이 날아온다. 이런 행위야 말로 중년여성들의 로망일 터인데...심히, 부러운 마음. 마사코는 부모의 병수발로 십수년을 보낸 뒤 자신만의 여유를 찾아서 핀란드에 온다. 그리하여 미도리와 마사코는 사치이의 식당일을 돕기 시작한다. 즐겁게! 그리고 카모메 식당은 점점 사람들로 넘쳐난다.
스토리는 이게 다다. 국수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고향의 맛, 오니기리의 승리! 라고 할 수도 있겠고, 여성주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된 여성들의 음식을 통한 우정 쯤 되려나? 그런데 이런저런 의미 이전에 이 영화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점은 세 여성의 삶을 떠 받치고 있는 그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이 세 여자들은 흔히 그 나이쯤의 여자들이 하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일단, 돈 걱정을 안하고, 가족들 걱정도 없고, 노후 걱정도 없다. 살림하는 여자들에게서 풍기는 군둥내가 안난다. 감독이 이것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버리려고 그녀들을 독신으로(짐작된다) 설정했을 수도 있고, 그녀들의 삶의 공간을 핀란드로 설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그녀들의 과거를 짐작하게 해 주는 장면들이 있긴 했으나,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그녀들이 각각 핀란드라는 맨땅에 헤딩하려고 맘 먹은 순간 그 이전에 그녀들에게 들러붙어 있었던 '현실적인' 고민들은 깨져버렸을 것이다.
무슨 애길 하고 싶은 거냐고? 영화하고 상관없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때로는 자잘하고 구질구질하게 끊임 없이 따라 붙는 일상의 곤란하고 어려운 일들을 얄짤없이 끊어내거나, 자기 앞에 주어진 어떤 인간적 책임이나 의무같은 것에 냉정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안 해 본 것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 하기 싫은 것은 안할 수 있는,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비현실적인 조건들을 현실화 시켜보자는 말이다. 철없고 이기적인 소리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말했잖아.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말에 설레였다고. 현실-비현실도 어떤 면에서는 선택의 문제다.
맛있는 음식이 감각을 되살아나게 하듯,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는 우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으로 안내할 것이다. 'いらっしゃい!' 카모메 식당의 그녀들이 어서 오라지 않는가. 점잖게, 터프하게 그리고 경쾌하게. 감독 인터뷰 봤는데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동감이다. 이랏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