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 2014년에 발간된 책이니, 근 10년만에 다시 읽는 셈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촌스럽다는 느낌이 없다. 그 당시에 꽤 트렌디했을 것인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있다. 옛날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여성의 정서를 잘 포착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에서 약삭빠르게 살지 못하고, 시선을 자꾸 허공에 두는 그런 여성들의 삶, 6개의 단편 거의 모두에 그런 인물들이 등장한다. 「금성녀」의 '마리'가 현실과 허공의 삶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는 인물로 그려졌으나, 그녀도 세속의 노인들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읽게 되는 책에는 종종 밑줄이 그어져 있어 책을 읽을 당시의 내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금성녀」에 밑줄 친 부분을 읽으며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결혼생활이 끝났을 때 느꼈던 행복에 대해서도 떳떳했다. 210." 마리가 느꼈을 '행복'을 10년전에 이미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행복은 아마도 온전히 혼자가 되는 해방과 자유와 동의어일 것이다. 결혼으로 더 고독하고 쓸쓸해지는 여성들의 삶, 생활의 작은 균열로 그런 삶에 내동댕이처지는 여성의 삶을 은희경처럼 미세하게 잘 포착해내는 작가는 없는 듯 하다. 세속적인 차원으로 보자면, 자살할 이유가 없는 유리의 죽음으로 서두를 시작한 「금성녀」는 어린 시절에 영화를 누렸던 두 여성의 삶과 주변 인물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화자인 마리가 사람에 대해,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삶의 불가해함을 언급하는 것으로 글이 마무리된다.
언니는 그런 말도 했었다. 어떤 때는 시간이란 게 끊어져 있으면 좋겠어. 다음 같은 건 오지 않고 모든 게 그때그때 끝나버리는 거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 잘하면 되니까. 지금 제일 잘하려고 안달 안 해도 되잖아. 그때 마리는 언니가 마리를 오해하듯 자신 역시 언니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뭔가를 잘 안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일 뿐이었다. 때로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히 들었다.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제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질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아주 먼 옛날 유리와 마리 자매는 백합과 샛별의 소녀였다. 223-224.
영화로왔던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현재를 사는 나의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 영향으로 나 또한 어린시절을 과장되게 미화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시골에서 누구도 신지 못하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빨간 피겨 스케이트를 신던 시절. 생각해 보면 에나멜 구두와 빨간 피겨 스케이트는 아주 잠깐 반짝이는 순간이었으며 그 보다 훨씬 더 긴 시간, 그러니까 그 시절의 일상은 궁색하고 우울한 것에 더 가까웠다. 에나멜 구두와 빨간 피겨 스케이트는, 그 기억은 이후 구질함을 버티게 하는 일종의 자존심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과장된 자의식. 「금성녀」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나의 유년을 떠올렸다. 일흔 여섯 나이에 느닷없이 죽음 선택한 유리가 이해되기도 했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 느꼈던 마리의 행복감도 이해되었다. 삶이 언제나 분명하고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은희경의 작품은 그 작은 틈을 잘 드러낸다. 여전히 그의 신간이 나오면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쓴다.
2014년 언젠가 읽었던 그 때에 밑줄 친 문장을 적어 본다.
방치하는 건 방향이 없다는 점에서 대처하기가 더욱 까다로운 폭력이었다. 자기 존중감을 박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을 좌절시킨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104. 「스페인 도둑」
예측할 수 없을 때는 순리를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111. 「스페인 도둑」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결혼생활이 끝났을 때 느꼈던 행복에 대해서도 떳떳했다. 210. 「금성녀」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