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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8. 4. 23:09

느릿느릿 급하지 않게 읽었다. 그런 책이다. 건축과 생태에 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결국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모아진다. 건축은 준공이 된 다음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415) 는 말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아오쿠리 '여름 별장'(어떤 의미에서는 이 별장이 주인공이다)에 대한 묘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저자는 선생님(무라이 슌스케)을 회상하는 사카니시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친절하게 제공한다.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모형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한 채 서서,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억누를 수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쓰러져가는 건축물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는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이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415-416)

시간을 거스르거나 그에 맞설 수는 없다. 그러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가능하다. 사카니시와 유키코 부부가 여름별장을 어떻게 수리할까를 논의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는 것은 무라이 슌스케로 대변되는 한 시대가 지나고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해줄 거라고" 하는 유키코의 말은 그들 또한 그들의 시대를 살 뿐 이후의 일은 다음 세대의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여름 별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을 이용하는 누군가의 철학? 취향?에 따라 변화될 것이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사카니시는 선생님인 무라이 슌스케를 계승하겠지만, 그 이후에도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 정신이 계승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은 그렇게 엄정하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작품에서는 시간의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구현되는 건축물이 등장하고(주인공이 좋아한 건축가 아스플룬드가 설계한 스톡홀름 시립도서관과 '숲의 묘지'), 가업을 잇는 마리코의 화과자점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한다. 또한 아오쿠리 마을의 소설가 노미야 하루에와 선생님의 애인, 정원사 후지사와 같은 인물은 품위있게 늙어가는 것의 정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무라이 슌슈케도 물론이고.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점잖다. 점잖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 또한 점잖고 교훈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독자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를 끈 부분은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분위기이다. 사무장격인 이구치, 가와라자키와 고바야시, 우치다, 사사이, 유키코, 그리고  사카니시와 마리코까지. 무라이 슌스케 선생을 정점으로 서로를 신뢰하면서 소신있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고, 부럽고, 부러웠다. 이런 조직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내가, 하면서 읽었다. 

몇년 전 부터 계속 눈이 띈 책인데 최근에 거의 동시에 두 사람에게 권유받았다. 우리 말 제목이 참 좋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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