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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27. 16:54

올해 처음 만나는 작가들이 많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메리 올리버. 보르헤스는 많이 힘겨웠고, 메리 올리버는 다음에 조용하게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완벽한 날> 보다는 <긴호흡>이 내게는 더 좋았다. 틈틈이 하루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외국작가의 글은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독서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 해야할까.

국내작가로는 황정은, 김연수, 허수경을 접했다. 황정은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이고, 김연수에 대해서는 뭔가 말랑말랑 할 것 같은 선입견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허수경은 관심이 가는 시인이었다. 워낙 시를 읽지도 않고(혹은 못하고) 시를 어려워 하기도 해서 시집을 구입하거나 시인의 글을 선택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날 문득, 아마도 허수경의 이 책을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 싶은데 아침마다 시를 한 편씩 필사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이주일째 노트에 연필로 시 한편씩을 필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기분좋은 느낌은 있다. 허수경은 그렇게 시와 함께 왔다.

시집을 먼저 읽어야 할텐데, 산문을 먼저 읽었다. 그녀의 개인적인 삶이 궁금해 지는 글이다. 지방대 출신 시인이 독일로 고고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시인이 문학도 아닌 고고학을, 그것도 유학까지 가면서. 그녀의 글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매우 뜨거운 사람, 뜨거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산문은 의외로 차분했고 다소 심심하기까지 했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별로 없었다. 타지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조용히 쓰는 사람의 모습. 포스트 잇이 붙여진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기숙사의 봄을 맞으며 떠나올 때를 생각하기, 혹은 아직 낯선 곳에 머물고 있는 이유를 생각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친구로 짐작되는 '혜경에게'에 들어 있는 문장이다.

시인이라는 삶이 시작된 건 아마도 말로 세계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겠지만, 인위적으로 그 삶을 목 졸리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말에 대한 애증 때문은 아니었는지. 독일은 우리말을 쓰는 나라가 아니고, 난 그게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아는 입을 자동적으로 다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무렵 나에게는 말을 멈출 수가 없는, 혹은 이대로 가다가는 말에 갇혀버리고 말 것 같은 '말 공포'같은 게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 도사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이 나를 부패시키고 말 것이라는 공포. 이런저런 이유로 근원을 알지 못하는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거지만 그 시절 나는 그런 걸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략) 그러나 봄이 오면 어김없이 강 냄새, 바다 냄새가 내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중략)그 냄새 끝에 아무런 생각다운 생각을 못하고 기숙사 방안에서 감기라도 앓는 봄날이면, 말에서 놓여난 자유를 아직도 자유답게 누리지 못하고 다시 그 말의 굴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지켜보면서, 아직 나는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고개를 흔든다. 말을 하는 근원을 나 스스로가 알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날, 나는 내 코끝으로 스치던 냄새들을 새로운 말로 적을 수 있으리라. 그때면, 나는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으리.(188-193).

그녀는 2018년 10월,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난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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