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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5. 17:29

외국작가들의 소설에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어느정도는 역자의 몫이 아닌가 싶다. 최근 몇몇 작품을 읽으면서 저자 못지 않게 역자의 몫이 매우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외국 작품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넘어서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행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고전적인 번역, 말하자면 현재 통용되고 있는 언어가 아니라 마치 한자어를 번역하는 것 같은 어투 때문에 <왼손잡이 여인>이 가진 현대적인 분위기가 다소 삭감되었다. 앞부분을 읽어나갈 때 고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작품의 물리적 배경이 첫 느낌과는 달라서 연보를 살펴보니, 집필된 연도가 1976년, 비교적 현대물이다. 읽는 내내 이중독서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의 글을 통해서 원래 페터 한트케는 어떻게 썼을까를 상상하면서 읽었다.

마리안느는 '불현듯' 남편 부르노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불현듯'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는 채로 부르노는 마리안느에게 마치 갑작스로운 해고 통보를 받듯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다. 마리안느의 태도에 대한 단서를 잡자면 장기 출장에서 돌아온 부르노의 말- "늘상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 왔지만 이제야 당신과 묶여 있다는 감정을 갖게 된 것이었어. 그래, 목숨을 내걸고 맹세할 수가 있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점을 직접 경험하고 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신이 없어도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24)-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남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지만 마지막 말은 마리안느의 심경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결혼한 여성의 독립선언(?)을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부간의 불화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여성의 심리를 너무 평면적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도드라진 문제가 없는 부부사이일지라도 여성은 남편을 떠날 수 있다. 오래 전에 했던 생각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떠올랐다.

이 작품에는 마리안느와 부르노 말고도 여럿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리안느와 부르노의 아들인 스테판, 마리안느에게 번역일을 주는 출판사 사장과 그의 기사, 아마도 패미니스트인 것으로 짐작되는 프란치스카, 마리안느의 아버지, 마리안느에게 한 눈에 사랑에 빠진 배우, 의류점 직원 등. 등장인물들은 제각각 겉돌고, 마리안느는 그들 사이를 부유하며 누구하고도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현실을 살고 있으나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마리안느가 있다. 남편과 헤어진 후 마리안느가 보인 행동을 통해서 마리안느의 선택과 마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집에 도착한 다음 여인은 거울 앞에 서서 오랫동안 자신의 두 눈을 들여다 보았다. 자신을 관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조용히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라도 한 듯 그녀는 그렇게 오래오래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46).

.....

여기까지 쓰고, 김진영의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읽기> 중 이 책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김진영은 <왼손잡이 여인>을 '고독'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냈다. 자본주의적 소외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을 사랑으로, 소통으로 여기며 산다. 그런 무리들 속에서 마리안느는 '고독'을 통과의제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에게 이르는 행복을 맛본다는 해석이다.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지만, 전과 다른 삶. 김진영의 글을 읽으니, 모호하던 것들이 분명해 지는 느낌이다. 낯선 독서의 좋은 길잡이이다.

 

 

<왼손잡이 여인>, 피터 한트케, 홍경호, 2019 5판 2쇄,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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