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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 14:45

소설을 읽으면 확실히 마음이 가라앉는다. 에세이를 읽을 때와는 다르다. 직접적인 학습(?)이 이루어지는 에세이와 달리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이게 뭔가, 멍한 기분이 들고 삶에서 내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있는 것이(물론 그것이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황정은에게 왜 끌렸는지 모르겠다. <디디의 우산>을 어렵고 힘들게 읽었던 터라 다시 그녀의 글을 읽겠는가 싶었는데 신간 <연년세세>가 나왔다. 신간을 읽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전작들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소설집 2권(아무도 아닌 & 파씨의 입문)과 장편소설 2권(야만적인 엘리스씨 & 계속해보겠습니다)을 구입했다.  

책이 출간된 시점을 보니, 내가 읽지도 쓰지도 않고 먹고사니즘에 지쳐 영혼을 갉아먹고 있던 기간이다. 이렇게 오래 꾸준히 쓴 작가인데 몰랐구나, 내가. 10년의 공백이 있으니 소설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작가가 뭘 쓰려고 했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모른채로 계속 소설을 읽어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근 10년간 무엇으로 부터 멀어졌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파씨의 입문>에 실린 모든 단편이 그렇지만 특히 '묘씨생'과 '뼈도둑'을 힘들게 읽었다.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힘들어 읽고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황정은이 그려내는 인물들의 감정은 글 밖으로 도드라지게 표출되지 않고 엷게 엷게 바닥에 침잠해 있어서 읽는 동안 숨을 죽이게 되고, 그래서 다 읽고 나면 휴~ 하는 숨이 터져 나오게 된다. 작품 중에서 '야행'이 그나마 친숙하게 느껴진 것은 그나마 등장인물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아닌>에서는 '상류엔 맹금류', '복경'의 이미지가 오래 남았다. '상류엔 맹금류'의 수목원 나들이 장면은 내내 답답하고 조마조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복경'의 마지막 장면은 섬뜩했다. 이런 감정들이 올라오는 것이 불편하고 썩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떤 면에서는 반갑기도 했다. 이 장면들이 나의 내면의 어떤 것과 연결이 되어있구나. 외면하고 살았던, 그래서 어쩌면 편하고 안전했지만 그래서 얄팍해진 것 같은 삶이 다시금 제 부피를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무의식 중에 황정은에게 끌렸던 이유는 아마도 이것이지 않았을까. 그동안 읽은 젊은 작가들의 책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것을 끌어냈다는 바로 그 것. 그리고 이것이 소설의 힘이다.  

두 작품집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눈에 띄는 묘사가 있었다.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와 '세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 무슨 의미로 사용했을까.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는 명백히 잘못된 무엇이며, '세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특히 '낙하하다'에서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데 무슨 의미로 씌여졌는지 잘 모르겠다.

-밑줄-

최초의 기억과 최초의 질문과 최조의 정서가 시작된 시점, 여기가 바로 겨자씨만한 파씨, 파씨의 발생, 조그만 주름의 시작입니다.(211/227).

인간이 인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계자라고 해. 사람들은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야....이게 뭐냐하면..그 자체야. 이 자세가 보여주는 그 자체....사람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 으로 충분하잖아? 그런데 그렇데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 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201).

 

 

파씨의 입문, 황정은, 2012, 창비.

아무도 아닌, 황정은 2016,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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