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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9. 14:21

얇은 산문집에다가 책 표지도 예쁘고, 외출할 때 휴대하기도 좋은 판형이고,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추천글도 읽은 것 같고,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읽다가 잠시 휴식하면서 읽기에 적당하고 등등. 책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읽고 싶어서'라는 원초적인 이유가 아니라, 이와 같은 세컨더리한 이유로 선택한 책이다.
번역서를 읽을 때는 늘 저자의 문체가 원래 이런 것인가, 라는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읽게 되는데 <작은 파티 드레스>는 전체적으로 과하지 않은 표현들이 맘에 들었고, 그래서 느릿느릿 읽을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낯선 작가의 글은 어딘가 모르게 품위가 있었다. 수록된 에세이 중에서 '아무도 원치 않았던 이야기'와 '날 봐요, 날 좀 봐요', '숨겨진 삶'이 기억에 남는다. 세 이야기 모두 글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저자가 어떤 명확한 주제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방식이라기 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의 의미를 누군가의 생활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글쓰기가 매우 세련되게 느껴졌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독자에게 전달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주장'이라는 것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런 이야기 구조의 특징은 문장을 발췌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왜냐하면 하나의 문장이 빛을 발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그 문장의 앞 뒤 전후가 모두 맥락적으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문장.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이르려면 누군가를 거쳐야 한다. 어떤 사랑을, 어떤 말(言)이나 얼굴을 거쳐야 한다./60
당신이 사랑하는 책들은 당신이 먹는 빵과 뒤섞인다. 그 책들은 스쳐 지나간 얼굴이나 맑고 투명한 가을 하루처럼 삶의 온갖 아름다움과 운명을 같이한다. 그것들은 의식으로 통하는 문을 알지 못한 채 몽상의 창을 통해 당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당신 자신은 결코 가지 않는 깊숙한 외딴방까지 교묘히 스며든다. 당신 안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것에 변화가 닥친다. 당신의 목소리와 눈빛이, 걸음걸이와 행동거지가 달라진다./77
나쁜 남편을 버릴 수 없듯이 나쁜 책이라고 도중에 팽개칠 수는 없다.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간이 소진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직도 소설이냐고, 남편은 놀라곤 한다. 그녀는 입을 다문다. 그 물음에 답하려면 왜 소설을 읽는지, 하는 의문에 먼저 답해야겠기에. 왜 여자들이 그런 기벽에 열중하는지, 독서에 시간을 낭비하는지 말이다. 내가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예요, 라는 진정한 답변을 이해할 사람이 누굴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예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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