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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21. 11:58

흥미로운 책이다. 서사적 구조를 가진 소설 작품들을 주로 읽어왔던 탓에 이 책이 낯설게 느껴졌다. 첫 장을 읽다가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 읽기도 했고, 마지막 장 <미래를 전망함>도 슬슬 읽어나가다가 다시 처음부터 집중해서 읽었다. 실존했던 인물들을 그린 작품이라서 틈틈이 등장 인물을 검색해 가면서 읽기도 했다. 정웰링턴의 삶을 상상하면서 읽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정웰링턴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젊은 그들'의 이야기로 대체되기도 했다. 정웰링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그 시대에 정처가 없었던 '젊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특히, 북한의 개인숭배와 숙청을 비판한 유학생들이 집단으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한 모스크바 유학생 망명 사건의 주인공인 리진과 한진의 편지 교환 장면에서는 울컥했다.

그들이 흩어지고 난 뒤 첫번째 편지를 쓴 것은 10월 중순이었고 리진이 사는 고장에는 이른 한파가 찾아왔다. 벌써 첫눈이 내렸다. 라지오 방송에 의하면 내 사는 곳이 제일 춥구나. 별일 없이 다 있다. 토끼 사냥도 시작되었는데 개가 없어서 성과를 볼 것 같지 않다. 그 대신 들꿩은 두 마리 잡았다. 또 여우도 좋은 놈을 한 마리 70미터의 거리에서 새를 쏘는 총알로 잡았다. 모피는 지금 침대 우에 걸려 있다. 나의 첫 여우이다. 논나는 목도리를 만들겠다고 야단이다. 우리나라 여우보다 더 크고 곱다./185

리진이 한진에게 보낸, 이 편지를 읽는데 마음이 묘하게 울렁였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으나 그 이면에 깔린 쓸쓸함이 강하게 다가왔다. 여기에 정웰링턴의 우울하고 갑갑한 분위기가 얹혀지자 이 책이 마치 현대의 소설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고전처럼 느껴졌다. 리진과 한진과는 달리 정웰링턴은 생각을 나눌 사람이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고독자로 살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증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그래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삶, 그런 삶을 상상하면서 작가는 이 작품을 썼겠지. 「모든 것은 영원했다」는 올 해 읽는 책 중 가장 흥미로운 책이고, 정웰링턴은 올 해 만난 소설의 주인공 중 가장 궁금한 사람이다.

[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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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유형별로 나누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개별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개체 사이의 유사성을 우리가 추상화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생물학적인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 행동 양식으로서, 심리적 유형으로서 그렇다/22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없었던 일을 쓰는 건 오해를 부른다. 감정을 쓰면 의심받는다....있었던 일도 없었던 일도 동일하게 문제가 된다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정웰링턴의 어머니인 현앨리스는 미국의 스파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파이로 판결받았고 처형됐다. 이것은 단지 억울한 일인가. 진실을 밝히면 더 이상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43

무엇이 우리를 구성하고 정의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구성하고 정의한다고 말해지는지에 대해서./53

그녀(헬레나)의 속물성은 타인에 대한 강요로 이어지지 않았고 초라한 질투심을 향하지도 않았으며 피해 의식에 물들지도 않았다./54

부정적인 것도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94

윌리는 안나에게 김강은 자신이 무엇으로 불리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107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자살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나의 선택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숫자, 개념 따위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132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했다. 관점에 따라 그것을 무능이라고 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능력이야말로 가장 과대평가된 덕목이다. 능력은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결국에는 그의 밖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 정웰링턴의 불능은 그가 가진 가장 적나라한 능력이었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기록과 목소리, 망각으로서의 그렇다./136

지금 있는 곳에 만족한다는 의미가 아닌, 여기보다 나은 곳이 있다고 믿는 희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거대한 픽션이고 우리는 이러한 픽션을 피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141

버지니아 울프는 순차적이지 않은 기억과 생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149

신념이 무너졌고 붕괴는 근본적인 원칙을 새롭게 사유하게 만들었다./179

편지를 쓴다는 것은 미래로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리카르도 피글리아는 말했다. 편지를 쓰는 동안, 우리는 그 자리에 없을 뿐 아니라,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현재 시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나중에야 서로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편지는 유포피아적인 대화 형식이다. 편지는 현재를 폐기함으로써 미래를 유일한 대하 공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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