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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7. 00:35

잘 읽히고 재미도 있었다. 그만큼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문제의식이 과잉되지 않은 문장에 녹아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보다 <잘 살겠습니다>와 <탐페레 공항>이 좋았다.

<잘 살겠습니다>의 주인공 '빛나'는 주변에 꼭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사람이다. 인하영 평론가는 사회성이 덜 발달된 사람이라고 했지만, '빛나'는 사회성이 덜 발달된 사람이라기 보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빛나'는 사회생활의 연차가 쌓여도 눈치 따위는 생기지 않을 것이고, 조직에서 민폐녀 혹은 기피 인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그런 분위기를 감지를 할 수는 있어도 그 원인을 자신과 관련지어 사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조직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빈약한 성찰능력은 그녀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제한 할 것이다. 즉 잘 살겠습니다, 라는 말은 실현 불가능한 다짐이다. 빛나의 '원래' 그런 성격은-눈치 없고, 악의없이 주변인들을 거슬리게 하는, 계산적이나 범위가 좁아 속이 보이는, 타인의 단순한 친절을 관심과 애정으로 착각하는 기타 등등- 동정없는 조직 사회에서 어떤 면은 강화되고, 어떤 면은 변질되고, 어떤 면은 왜곡될 것인데 분명한 것은 그 변화의 과정이 본인에게도 조직에게도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나를 지키며 조직 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균형감각이 없는 사람에게 예견되는 비극의 서막쯤 되려나. <잘 살겠습니다>는 그렇게 읽었다.

<탐페레 공항>의 핀란드 노인은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고 떠오르는 질문 같은 존재이다. 잊으면 안되는데 잊고 있었던, 외면하면 안되는데 왠지 외면하고 싶은 그런 질문. 사람들 마다 질문의 내용은 다르겠지만,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그래서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 때 품었던 생각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가 핀란드 노인을 아직 살아있는 인물로 남겨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질문이 아직 유효하고 힘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로 봐도 좋을 듯 하다.

반면에 <다소 낮음>의 주인공에게는 저런 질문 자체가 유효하지 않다. 그는 아직 '어리고', 아직 '순수'하다. 그래서 자신의 음악적 신념(까지는 아니고 고집? 까지도 아닌 그저 양심 정도)을 지키느라 어떤 기회를 스스로 놓아 버린다. 사회적 조건과 자신의 조건을 조율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에너지 효율 소비 효율 4등급이 암시하듯 다소 낮음 혹은 매우 낮음의 계층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해설을 쓴 인하영은 이 소설집을 <센스의 혁명>이라는 말로 함축했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어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중략)노동과 일상의 경계를 명민하게 알고,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이 시대 가장 보통의 우리들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센스를 겸비한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이다(215)

센스라... 그렇게 규정하니 그건 것 같은데, 나는 '균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로서의 위치를 정확하게 자각하고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예민한 센스를 발휘할 줄 아는'(230)영리한 젊은이 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센스를 타협이라기 보다 웅전'이라고 해석하는 마음은 영리한 젊은이들을, 삭막하고 살벌하기까지한 조직에서 아메리카노 2,000원을 테이크 아웃 할 때에도 머리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젊은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타협이라고 하기가 뭣하면 센스는 웅전이라기 보다는 조율이다. 워라벨. 일과 삶의 균형일 뿐이다.

책을 읽기 전에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 자체가 주는 기쁨과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삶의 빛과 그림자였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구나, 라는 생각에 묘하게 위안이 되기도 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에 젊은 독자들이 열광하나 보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창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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