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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3. 19:38

'가족과 돌봄노동, 여성과 연대에 대한 강렬한 목소리'라는 창비의 광고 문안은 이 책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접근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롤로그 격인 서두에서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연한 드라이브신은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한영옥과 은아의 옥상 담배신과 정확하게 겹친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모든 것이 시작되는 3월 봄밤에 두 여성 시인이 돌이키기 싫었을 지난날의 상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자살로 잃고 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공통의 경험이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차이를 훌쩍 뛰어넘게 했겠지요.(17).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담배를 두대씩 피우고 잠시 숨을 고르고 병실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영옥씨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105-106).

옥상의 담배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20) 끝내 실패했던 주인공 은아가  한영옥으로 부터 받은 단 한번의 친밀함(13)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저자가 이 '단 한번의 친밀함'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삶을 공유하지 않아 저간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 맞딱드렸을 때 이해하고 이해받는 경험, 그런 경험이 주는 친밀함 같은 것 말이다.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단 한번의 친밀함은 '나는 지금 살고 있어요'(19)라고 말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이런 친밀함은 갑자기 생기는 것 처럼 보여도,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비숍과 리치가 그렇고 한영옥과 은아가 그렇다. 그 경험은 지은 죄도 없이 용서를 받는 기분(107)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경험이다. 이런 사회에서 단 한번의 친밀함이 연대의 가능성을 만든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는 여기까지가 이 책의 몫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만 읽어내기가 아쉽다. 아쉬움의 정체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돌봄노동으로 파괴되어 가는 가족관계? 이것도 아니고.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의 이중성? 이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으나 끝내 실패한 이야기, 단절? 이것도 아닌 것 같고. 뭔가가, 내 마음을 건드린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뭘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뭘까? 시간을 두고 다시 읽어보면 어떤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이주혜, 처음 접하는 작가이다. 자분자분한 글쓰기. 문체가 참 선선하고 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두>, 이주혜, 창비, 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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