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2nd story
between pages
diary
with others
film
my work
T.P
office
feminism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21. 3. 20. 16:44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가 이 책을 선택하게 했고, 이강은의 성의 있는 번역 덕에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1886년의 작품인데도 현대적 삶과 죽음을 다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것을 고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반 일리치의 삶은 곧 나의 삶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치 처럼 나도 적당히 사교적이고, 공손하며, 경제적인 안정을 구가하고 싶어하며, 실제의 생활보다 남들의 눈에 더 풍요로운 것 처럼 보이고 싶어 하며, 그렇게 행동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기도, 그렇다고 방해받기도 싫어 적당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그 틈을 교양과 품위로 메운다. 이반 일리치의 가식과 허위위식, 그리고 김진영이 말한 스노비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도 않고, 상식에 준해서 살(았)기 때문에 사회적 해악이 빚어지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적 책임과 비난으로 부터도 안전하다. 나의 지식은 이 안전망 아래의 진실을 감추는 목적으로 기능하였다. 아주 공고하게. 그렇게 얻게 된 (남들 보기에)정서적으로도 균형이 잡혀 있고 심신이 건강한 삶. 그래서 나의 삶은 안전한가, 좋은 삶인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이반 일리치의 아내와 그의 동료들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다. '뭐, 그럴 수 있지'라는 한 마디로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병든 남편 지켜보는 아내의 짜증과 남편의 죽음 후 보상을 계산하는 아내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고, 이반의 죽음이 가져올 이익을 생각하는 동료의 태도도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은가.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을 문제 삼는다고 느꼈다. '뭐, 그럴 수 있지'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덮어두는 진실들. 그 진실을 김진영은 허위에 찬 속물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과 삶에서 소외된 죽음의 권리를 되찾는 방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 속 예술의 부활과 연결짓는 방식으로 풀이했다.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친밀하게 다가온 것은 첫번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제 3자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진영의 두번째 해석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좀 멀리갔다는 생각이 들긴했으나, 마지막 장면-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118)-은 부활의 환희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떠밀린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의 권리를 회복한 결과 얻게 된 환희라는 점에서 두번째와 세번째 해석은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김진영의 힘을 빌어 숙독했는데, 김진영의 글을 접하지 않고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부터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낀다. 책의 어떤 부분이 나와 연결되는 느낌들이 들기 시작한다. 책으로 도피하듯 하지 말자고 생각해서 그런가, 급하게 읽지 않고 천천히 읽는 습관을 다시 들이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잘 읽었다. 첫 장부터 번역이 참 좋다고 느꼈는데, 역자의 말을 읽어보니 이 번역본으로 읽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 번역작품은 천천히 음미를 하며 읽는 것이 상례지만 특히 이 작품은 조금 더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작품을 잘 감상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독자들이 매 순간 마음의 변화에 스스로 주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149)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이강은, 창비세계문학, 2020.11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