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오랫동안 책상 위에 두었었다. 나도 은유처럼 글쓰기 강좌를 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름의 커리큘럼이 있고, 계획도 있다. 퇴직하면 해야지, 현실의 장벽인지 핑계인지 모를 이유를 들어 지연시키고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거의 모든 면에서 동의가 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런 면에서 딱, 기대한 만큼이었다. 단, 여럿이 함께 글쓰는 일에 대한 체험의 부재-결정적으로 나에게는 이것이 없다. 은유처럼 부딪치며 체험해서 얻은 결과물과 사유만을 통해서 생각한 내용은 모든 면에서 같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면에서는 다를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개별적 체험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른다. 은유가 좋아하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사람들이 글로 풀어내는 체험에 감응이 될런지도 잘 모르겠다. 평가와 비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경험을 통해 흔들리고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이지만,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실행력이 문제다.
또 하나, 이 책을 읽고 잠자고 있던 인터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논문 형식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에 하긴 했는데, 지금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은유가 '나만의 민중 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 처럼 나도 주변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싶다. 인터뷰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그와 관련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이가 될 수 있는 사람과 못되는 사람의 구분은 자기표현 능력이 아니었다. 사회적 관계의 여부다. 보이는 존재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인가. 관계의 끈이 없으면 자기를 규정할 수도 없고 존재가 드러날 수도 없다. 백 세 어른신에게 반찬봉사를 다니던 한 사람이 어르신의 누워있는 등을 보고 삶을 읽내고 번역했듯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보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느낀다. 가장 큰 빈곤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205).
지나치게 관계에 의존해서 '자아'를 규정하는 부분은 마음에 들지도 않고, 다 맞는다고 할 수도 없으나 인터뷰에 국한해서 볼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그 밖에...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무엇이 한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놓았을까. 그 사람은 왜 지금 거기에 있을까...(중략)....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137).
인터뷰에 관한 주제는 아니었지만, 이또한 인터뷰에 필요한 기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159).
백퍼센트 공감하는 내용이다. 내가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메멘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