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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17. 15:45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막고."
첫 문장을 읽고 풋, 웃음이 나왔다. 이 작가가 이 글을 경쾌하게 끌고 나가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웃음 뒤에는 어김없이 코끝이 찡해졌다. 책장을 덮으면서는 눈물바람을 했다. 빨치산 이야기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했더라면 '공감'을 하는 대신에 '학습'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저자의 전작들 처럼 읽는 사람만 읽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 책은 빨치산의 딸인 화자가 유물론자 빨치산 아버지의 생을 이해하고 결국은 아버지에게 구속되어 있는 마음을 해방시키는 이야기이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화자는 장례식장을 찾는 아버지의 지인과, 이웃과 뜻하지 않은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장례식을 찾는 여러 인물들은 아버지와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화자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다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말은 어머니와 화자를 속터지게 하는 말이지만 아버지의 주변 인물들에게 그 말은 아버지의 존재를 평생 간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장례식을 찾은 여러 인물 중에서 인상적인 인물은 노랑머리 여자아이와 노동이 힘들고 싫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전직 빨치산 동료이다. 노랑머리 여자아이와 아버지의 관계는 다소 전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영화로 치자면 클리셰에 해당하는-마지막 장면에 이 아이를 다시 등장시킨 것을 보면 다분히 작가의 의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노동이 싫어 월북을 선택한 아버지의 친구. "사흘 노가다 뛰고 석달 입원했네. 나는 암만해도 노동과 친해지질 않아." "저놈의 부르주아 근성은 머리가 희캐져도 뿌리가 안 뽑히그마이. 그런 놈이 멀라고 빨갱이는 돼가꼬..."(150). 이렇게 재미있는 인물이 작품에 수도 없이 나온다. 적당히 속물이지만 정이 깊은 사람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살뜰하게 챙기는 요령있는 사람들. 우파도 좌파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 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빨치산의 딸인 화자는 아버지를 입체적인 인물로 이해한다.


책을 읽는 내내 구례 사투리의 말맛과 시골의 장례 풍습(?)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접하면서 이런 것을 '기록'하는 작가가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 젊은 친구들에게도 '먹히는' 책이어서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질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 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81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

 

* 이 작가가 옛날에 옛날에 <고욤나무>로 등단한 작가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고욤나무의 인물이 머리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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