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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 18:27

젊은 작가들의 산문과는 많이 달랐다. 느리게 천천히 읽어야 했고, 책 장을 덮고 읽기를 멈추기도 했다. 서두르면 안될 것 같아서 천천서 어렵게 읽었다. <공터에서> '작가의 말'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 하였다"더니 이 말도 몇 군데 다시 등장한다. 일흔이 넘어도 세월이 가는 게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오지는 않는가 보다. 오십 대에도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 하는데, 육십에도, 칠십에도 허덕지덕 늙어가야 하는 것인가. 아득하다.

오래 들여다 보고,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이 글이 되어 나오는 것 같다. 김훈은 흥분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뭐 그렇게까지 팩트에 기초해서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어떤 글을 르뽀 기사같다. 전직 기자라서 그런가. 그의 이런 태도는 이순신에 대한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 의지해서 그의 지도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헤아리건대, 그는 우선 이 모든 악조건과 그의 정치적 불운을 모두 '사실'로 긍정하고 있다. '사실'에 정서를 이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오직 '사실'로서 수용하는 태도는 그의 리더십에 한 중요한 본질을 이루는 듯 하다(117).

그래서 그의 글은 냉정하고, 연민이 없다. 감상적이지 않다. 감상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해 애정을 표할 때, 그 애정은 진짜로 느껴진다. 가령 몸으로 시를 쓴 할머니들의 글에 대해 말할 때가 그렇다.

할매들은 감추거나 꾸미지 않는다. 할매들의 글을 읽으면서, 한 문명 전체가 여성의 생명에 가한 야만적인 박해와 차별을 성찰하는 일은 참혹하다. 그리고 야만 속에서도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존해온 할매들의 생애 앞에서 나는 경건함을 느낀다(273).

크게 보면 건조한 산문집인데, 그 건조한 집 안에 여린 마음들이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을 잡은 문장은 '꽃과 노을'을 첫 문장이다.

밤에 등을 끄고 누워 있으면,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색깔들과 마당에 핀 도라지꽃의 흰색, 보라색이 어둠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를 나는 걱정한다. 어렸을 적에 하던 걱정을 늙어서도 한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면, 그림 속의 색들은 촛불의 빛에 흐려져서 느리게 다가온다. 색은 빛이 사라지면 사라지고 빛이 닿으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색은 주민등록지가 없다(350).

어렸을 적에 하던 걱정... 아마도 이 문장이 내 마음에 들어 온 것은 어릴 적 소년의 걱정이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저 아름다운 것이 사라져가면 어쩌나, 그 조마조마하고 어쩔 수 없는 감정이.

글의 종류와 상관없이 김훈의 책이 출간되면 선택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장식없는 그의 문장에 주목했다. 나는 단순하고 간결한 그의 문장이 좋았다. <연필로 쓰기>에서는 그의 문장보다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 혹은 태도가 먼저 다가왔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숙고하지만  주장하지 않는 글.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 잠깐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일흔이 넘어도 자신의 신념이랄지 가치관이랄지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의 태도는 무엇일까. 그는 책의 서문 격인 '알림'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여론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붙어서 편을 끌어모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연필로 쓰기>, 김훈, 문학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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