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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31. 20:32

책이 너무 좋으면 리뷰를 쓸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마음에 닿은 구절을 한 번 더 새겨보는 것으로 이 책을 기록하기로 한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을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18)

내가 당신이라는 목적지만을 찍어 단숨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거쳐 그것들의 총합인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 그 내력을 가져보고 싶게 한다.(24)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25)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55)

늙는다는 것을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해왔다. 서른과 마흔의 나는 궁금하지 않은데, 일흔 즈음의 내 모습은 보고 싶었다. 중간의 시간을 다 살아내는 일이 막막하기만 해서, 끝을 떠올리길 버릇했는지도 모르겠다.(66)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68)

어떤 일을 겪고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살 수는 없어, 그건 거짓된 삶이야, 하지만 이제 볕이 보이네, 라고 생각했다.(97)

봄이 짧다는 탄식은 어쩌면 봄 꽃만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사실은 중간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때만을 봄이라 부르지 않는다면.(147)

아무리 쓸모도 정처도 없이 걷는다 해도, 산책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계속 이어지더라도, 그만 멈추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이나 사랑이나 꿈을 두고 그런 지점을 느끼듯이...결심하는 자리에 돌아갈 집이 요술처럼 나타나지 않으므로, 다시 왔던 만큼을 다 걸어야 한다.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돌아가는 길을 얼마나 순순히, 서두르지 않고 걷느냐에 달려 있다.(155)

죽은 자들을 보며 삶에 대한 열정과 동력을 얻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죽음에서는 죽음만 얻고 싶다. 타인의 죽음에서 다른 그 무엇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말이다.(161)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무엇을 바랄 수 있을지, 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은 아름답게 걷고자 합니다.(172)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게 될 책이다. 가까이 두고 계속해서 읽게 되는 책.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 흐름,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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