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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5. 19:33

'이렇게 단정하게 글을 쓰는구나'라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이다. 그 어느 책 보다 포스트 잇이 많이 붙었다. 저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숙고한 결과가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일테다. 서문 부터 마음을 당기는 구절이 있었다.

평소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

이런 시각이 좋다. 개인적인 행위가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기조위에서 쓰여졌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균형잡혀 있다. 예술가들의 기이한 기질들을 언급하면서도 그 기질이 현실적 삶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들레르의 열정을 이어받은 현대의 시인들은 '무덤 뒤의 찬란함'에 자주 도취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빛을 일상적 실천의 등대로 삼는다. 언제나 물질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그 찬란한 빛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다른 세계의 빛이 이 세계의 실천을 지시한다. 저 불행한 청년은 이 실천이 두렵고 세상의 온갖 장애가 두려워, 이 세상을 파괴하고 저를 파괴하였으며, 마침내 저 찬란한 빛을 꺼버림으로써 자신이 가고 싶어했던 죽음 뒤의 세계마저 지옥으로 만들었다(34).

황현산은 현실적 삶에서 패배하지 않는 기이함, 이것이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엄격할 수 밖에 없으며, 출간되는 책은 말의 논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124).

<언어, 그 숨은 진실을 위한 여행>에서 언어에 대한 숨은 진실을 말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 까지 하다.

어떤 언어로는 절실한 진실에 다른 언어는 관심조차 없다. 언어가 서로 만날 때 이 불확실한 것들이 솟아올라와 산과 들을, 사랑과 증오를 새롭게 고찰하고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 진리는 늘 새로운 언어를 얻는다. 그래서 한 언어의 관점에서 다른 언어는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숨은 진실을 쌓아놓은 저장고와 같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언어를 지키고 가꾼다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의무가 된다(149).

이 부분 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言語觀이라 할 만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말은 이제까지 그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말에 다시 첨가되는 또하나의 말이 아니라 기존의 말들과 그 관념을 지워버리고 그 대상에 대해 늘 지녀왔던 인식을 전적으로 전복하는 말이 된다. 결코 바뀔 수 없던 것이 문득 다른 얼굴 다른 성질을 지닌다. 낯익은 것이 낯선 것이 된다....이때 현실은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더라도 감추어져 있던 그 비밀스러운 구석들이 햇빛 속에 얼굴을 들어 다른 현실의 발명에 참가한다. 현실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확대된다(246-247).

이것이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가 가진 힘을, 이렇게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풀어쓴 글을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찬찬히 곱씹으면서 읽었다. 뒷부분, 서평 부분에서는 거칠게 읽었지만 책의 앞부분에서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은 부분들이 많다. 황현산을 만난 기쁨이 크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난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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