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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31. 15:54

이 책은 힘들다.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바른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론적으로 바람직하고 타당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드러내며 구체적인 행동을 말하는 방식. 이 책은 후자라서 더 아프고, 찔린다. 그저 바람직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장마다 실제 인물들이 언급되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드러낸다. 거의 모든 이야기를 편안하게 읽을 수 없다.

장애인 시설과 장애인들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조금 돌아보게 되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 얻은 실질적인 변화라면 변화이다. 아직은 내가  이런 책을 선택해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얼마간의 안도감도 있었다. 그 안도감이 지적 혹은 사회적 허영심과 비슷한 것이라도.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불편하다. 나의 양다리 식의 삶의 태도를 일깨워 주기 때문에 불편하고, 뭔가 이젠 이 책에서 말하는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 느낌이 뭔가 비겁하고 이기적인 선택으로 인한 결과인 것 같이 느껴져서 불편하다. 이 책을 극찬하는 사람들(그들은 정말로 이 책의 내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책이 지향하는 바대로 생각하고 행동할까?)과 달리, 몇몇 장은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관심 밖의 내용이라서,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넘겨진 페이지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을 심어주는 책. 나는 그 세계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서론 격인 '나는 왜 쓰는가'이다.  홍은전은 이 글에서 우물안 개구리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홍은전의 우물이 아니라, 그녀를 당황케 한 건축 전문 강사의 우물에 속해 있을 수 있다는 자각이 슬펐고, 한편은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난 우물 밖 사람 역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힌 듯 보였고,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더 거대하고 더 유구한 우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우물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날 나는 나의 우물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계관이란 나의 우물이 어디쯤에 있고 다른 이들의 우물과 어떻게 다른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22).  

유난히 포스트 잇이 많이 붙은 책이다. 눈에 들어온 부분을 기록하고 가끔 꺼내보는 것으로 이 책에서 느낀 불편함을, 나의 양다리 습성을 조금이라도 면책받고 싶다.

위로를 하려면 그들이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응원하기 위해선 그들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51).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앏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위험'이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그런 앎이 있다(105).

누군가의 평생이 있어야만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상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운 위로입니다(129).

어떤 문제를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현실을 바꾸거나 최소한 직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228).

중력이 다른 세계에선 다른 근육과 다른 감각을 쓰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노들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다르게'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248).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같은 표현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글쓰기란 '굳이 말로 설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253).

<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 책,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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