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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10. 23:04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을 '책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했다(138). 그렇다. 폐지 압축공 한탸는 폐지 더미에서 책을 찾아 읽으며, 자기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은 그의 말대로 '온전한 러브스토리'이다(9). 이 사랑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게 되자 그는 스스로 폐지와 함께 압축기에 들어간다. 마지막 장면을 출장 길에 KTX에서 읽었는데, 기차 소리가 압축기 소리로 오버랩되면서 공포와 슬픔이 밀려왔다.

처음, 한탸에게 책은 피난처가 아니었을까.

인스타그램을 책스타그램으로 운영하는 사람들 중, 독서를 일종의 고단한 생활의 도피처로 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 범주에 한 쪽발을 담그고 있는 상태라고 느낀다. 누구에게나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필요하다면 현재 나에게 그것은 독서이니까. 그래서 한탸의 독서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한다.

책이 혹은 독서가 지적 허영의 발로일 수도 있겠고,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일 수도 있겠고, 이도저도 아니면 취미나 습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는 것 같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관점을, 능력을 주는 것을 책의 독서의 기능이라고 믿고 싶다. 한탸는? '뜻하지 않게 교양을 얻은' 것이 햔타에게 일차적인 독서의 이익이었다면, 장장 삼십오 년간 문장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독서(10)를 통해서 그는 한껏 고양된 정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나는 책(독서)의 '기능'을, 한탸는 책(독서)과의 합일을. 그래서 한탸는 스스로 책과 함께 압축되면서(스스로를 파괴하면서) 생각한다. '난 세네카요, 소트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131).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파괴로 완성되는 삶? 잘 모르겠다. 이 책도 <보이지 않는 도시들>처럼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매력적인 작품이다. 외국작품에서는 문장의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의미있게 다가와서 베껴쓰고 싶은 욕구가 들기도 했다. 한탸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흐밀 흐라발, 이창실, 문학동네, 2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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