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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26. 17:11

알라딘 서핑하다가 이 책을 접하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에세이를 안읽으려고 했던 터라서 장바구니에 묵혔다가 김진영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과 함께 주문했다. 김진영 에세이는 안읽을 수가 없다.

요즘 틈틈이 피아노를 치고 있어서 '백혜선'이라는 이름이 반가웠다. 뭔가 오래된 앨범에서 잊고 있던 친구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나이가 같아서 그런가. 그런데 제목은 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좌절의 스페셜리스트라니. 호기심이 발동했고, 그 호기심에는 그녀의 좌절을 내 삶의 위안으로 삶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좌절은 내가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자로 살기 위해 (누군가에겐 그것이 목표인)서울대 교수직을 때려칠 수 있는 사람. 좌절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닥친 여러 형태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말도 정확하지 않다. 백혜선의 좌절은 여러 어려움 중 피아노 연주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에게 생활의 어려움은 그저 '어려움'일 뿐 좌절의 타이틀을 부여받지 못한다. 그래서 좌절이란,무엇인가에 죽도록 매달려 본 사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단어이다.


나는 당연히 좌절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인생이 계획대로 안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이 책의 어느 대목에선가 내가 인생의 계획이라는 것을 세워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인생이 계획대로 안된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이 안되는 말이고 당연히 좌절 또한 내 인생에 없었다. '이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뭘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 이것은 반성이 아니고 그저 팩트를 진술하는 것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백혜선과 나는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그런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성취(꼭, 사회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를 하는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핑계인가? 


문제는 지금까지의 내 삶이 내 마음이 드는 것이었는가, 그보다 이후의 삶을 내 마음에 들도록 디자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게다. 그래서 유일하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공감했다. 


나이 들어가는 연주자로서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기교적인 면에서 젊고 창창한 연주가 들려주는 수준을 나는 결코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무대에서 한 번도 해오지 않았던 획기적인 기획을 시도하는 일도 그들보다 부족할 것이다. 한 세대 이전의 연주자인 내가 지금의 젊은 연주자들만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대중을 상대로 감동을 자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연주를 계속해 볼 생각이다. 젊은 연주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연주가 있다면, 늙어가는 연주자가 들려줄 수 있는 연주도 있다. 러셀 셔먼 선생님이 아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연주 자체로 나를 울린 것처럼, 예순, 일흔이 넘은 나의 선배들이 저 앞에서 음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나도 나만의 세계를 그려가고 싶다/280-281


나의 다짐 같기도 한 그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모든 동년배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그 밖에 책에서 인상적인 장면,

"연주자한테 연주 말고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연주자한테 연주 말고 필요한 것은 전부 다everything야!/ 120-121


역시 나는 강력한 스승 혹은 멘토에 언제나 끌린다. 백혜선에게 러셀 셔먼 같은.


약간의 허세를 보태 말하자면, 나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도달한 채로 인생의 마지막을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내가 어딘가에 도달해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146


안온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이것이 정녕 나의 삶인가 하고 느낄 때면, 그 각성을 그대로 넘겨서는 안된다. 안온한 일상에 가려진 내 삶의 무언가가 삐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이 편안한 생활을 유지할 것인지, 불안에 몸을 던지더라도 성실하게 내 삶을 실험할 것인지.  어떤 선택이 옳은지는 모른다. 어쩌면 상당히 고단한 책임이 뒤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여기가 종착역'이라면서 눌러앉지 말기를, 아무리 좋은 곳일지라도 그곳을 잠시 머무르는 정차역이나 환승역이라 여기기를 나 스스로에게 당부하려 한다./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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