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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4. 8. 17:59

뭔가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옆으로 밀어두었는데 읽기를 시작하자 몰입감이 대단했다. "박·수·용"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감과 무게가 읽기 전 부터 느껴졌다. 찬찬히 문장을 음미하고 문장들이 그려내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읽으려고 애썼다.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나왔고, 울먹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가 "꼬리"에 대해 갖는 감정이 저자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삶과 죽음을 대비하는 문장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특히, 한 때 숲의 왕대였던 꼬리가 삶의 전성기를 지나 삶을 내려놓기 까지 매 순간 품위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저자 박수용의 것이기도 했고 나의 것이기도 했다. 퇴직을 일년 남짓 남기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꼬리의 쇠락과 죽음을 남다르게 읽었다. 박수용만큼이나 간절하게 꼬리가 품위를 지키며 죽어가길 바랬다. 내가 많이 투영된 읽기 결과이다.

나는 꼬리의 죽음이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이루지길 바럈다.(106)

나는 온전히 나의 속도와 나의 계획과 나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퇴직을 준비할 것이다. 그 어떤 누구의 평가에도, 기대에도, 요구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나의 마음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런 마음이 투영이 되어서 꼬리의 품위있는 마지막을 기대했다. 꼬리가 삶과 배고픔 사이에서 갈등하다, 마을로 내려왔을 때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가 비루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 바람은 나의 다짐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했다. 이 책이 남다르지 않은 이유이다.

삶에 집착하면 죽음이 허술해지고, 죽음을 이해하면 삶이 허망해 진다(17)

죽음 때문에 삶을 내팽겨쳐도 안 되지만 삶 때문에 죽음을 내팽겨쳐도 안된다. 그것이 자연에서 죽음이 삶을 끌어안고 삶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84)

죽음은 이미 삶 안에서 존재하여 묵은 삶이 흘러가야 새로운 삶이 온다고들 한다.(123)

'교감'이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으로 쓰여서 박수용과 꼬리의 관계를, 꼬리에게 느끼는 박수용의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감...,이라기 보다는 박수용이 자신의 삶을 꼬리에게 이입했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아마도 내가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꼬리가 나 같았다. 적지 않은 시간을 호랑이와 함께한 박수용에게 꼬리라는 존재의 의미를 내가 감히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박수용은 이렇게 말했다.

호랑이와의 만남. 그것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 중에서 오직 호랑이만이 그때껏 수많은 동물들을 찍고 만나면서 겪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호랑이만이 나를 초라하게 했던 겁니다. 호랑이는 항상 우리를 먼저 봅니다./ 「사생활의 천재들」 (60)

호랑이는 개체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자연의 법칙을 따릅니다. 호랑이는 욕구를 참을 줄 압니다. 오른발을 내딛었어도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왼발을 든 채 정지 상태로 5분도 참습니다. 먹을 것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사생활의 천재들」 (67)

인용은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감정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눈동자를 꿈뻑거리자 불빛이 꺼졌다 다시 켜졌다. 세월이 맹수를 늙게 했다. 늠름했을 등골뼈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었고 어깨뼈는 메말라서 장작처럼 치솟았다. 갈기털은 성성하게 뻗었지만 짚북데게처럼 가스러졌고 커다란 얼굴 가운데 빛나는 동공은 텅 비어 보였다. 이미 가축을 습격한 길이었다. 그것을 먹으러 눈보라를 헤치고 저렇게 나왔다. 잡은 것이 산천을 뛰놀던 사슴이었다면 동공이 저렇게 비어 보일까? 그 텅 빈 눈빛이 내 몸을 뚫고 들어와 전류처럼 돌아다니다 빠져나가며 내 마음까지 텅 비워버렸다.(111)

어쩔 수 없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일이다. 엄마만 봐도 알 수 있다. 시간을 이기지 못하는 육체와 그에 비례하여 쇠락해 가는 정신은 보는 사람까지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 낡은 육신과 정신을 질질 끌며 남은 생을 품위있게 마감하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꼬리에게 거는 박수용과 나의 기대는 꼬리와는 무관한 박수용과 나의 희망일 뿐이다.

억새밭으로 들어가려던 꼬리가 문득 멈춰섰다. 고개를 돌려 산막을 바라보았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연민이 느껴지는 존재가 뒤에 남았거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 때이다. 뒤쪽 어딘가에 남겨진 나의 체취를 다시 한번 짐작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의 그림자 뒤에 드리운 삶의 여운이 얼마나 남았는지 내보려는 것일까?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 봐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늙은 인디언 같았다.(176)

육체와 정신이 쇠락했다고, 생에 대한 연민까지 완전하게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늙은 자의 자기연민은 또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자는 바로 꼬리 자신일 것이다. 과거 자신이 어떤 상대를 밀어붙였을 때 상대가 보여주었던 행동이 기억났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이 그 상대가 행동한 대로 따라 하라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진실이란 대개 강한 아품과 허무를 불러온다. 그러나 꼬리의 간결한 흔적 속에는 본능에서 움튼 미련과 망설임이 섞여 있지 않았다. 이제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시간이다.(182)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시간이다....나에게 하는 말.


그를 처음 만난 후 나는 사슴이 소금절벽에 끌리듯 그에게 끌리게 되었고 그에게 꼬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프리카 어딘가에선 이름을 붙여주면 그를 돌볼 책임이 생긴다는데, 나는 그저 숲속에서 버리고 온 그의 발자국들이 하얀 눈으로 덮여 사라지듯 자기 종족의 방식대로 그가 삶을 자연스럽게 마감하기만을 바랐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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