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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23. 16:18

연휴에 읽은 책을 정리해 본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 최은미의 「아홉번째 파도」, 최진영의 「내가 되는 꿈」.  「문맹」을 잘 읽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자기연민 없이 이렇게 담담하게 쓸수 있나, 하고 생각해 보니 저자가 모국어로 쓴 글이 아니라 적어(敵語)로 쓴 글이다. 처음에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다. 인스타그램 마리님의 후기 "군더더기 없는 적확한, 최소한의 언어로 말하여지는 삶을 들여다 보는 일"이라는 표현에서  담담함이 저자의 의도에 더하여 타인의 언어을 사용하는 자의 한계로 부터 비롯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한계는 언어를 활용하는 능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자 하는 것을 최대치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마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소한의 언어로 적확한 표현을 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 것은 한참 후, 어린 시절을 감싸던 은(銀)실이 끊어지고, 불행한 날들이 찾아오고, 내가 "그때는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그런 시절이 도래했을 때의 일이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과 헤어져, 이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한 해결책이라고는 쓰는 일 밖에 남지 않을 낯선 도시의 기숙사에 들어갈 때./24-25

고통을 폭발시키기보다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때는 고통의 내용보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화자의 마음에 더 집중하게 된다. 담담해서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되는 책. 한 번 읽고 제껴두지 않고, 종종 꺼내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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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는 그간 읽어온 젊은 작가들과 다른 지점에 놓여있는 것 같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지금 우리 마주」를 처음 읽었고,  「아홉번째 파도」는 두번째로 접했다. 어디선가 최은미에 대한 좋은 평을 읽었고, 그 기억이 그의 작품을 선택하게 하였다. 제법 긴 장편을 끌고 가는 서사가 만만치 않았고, 바로 그 점이 요즘의 다른 작가들(?)과 대별되는 지점에 있다고 느꼈다. 지금도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구나.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 천착하며 쓰는 사람.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되지는 않겠지만, 믿을 수 있는 작가라는 인상을 남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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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내가 되는 꿈」을 단숨에 읽었다. 재미도 있고, 몰입감도 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성장소설인데, 그래서인지 군데군데 감정이입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여전히 어린시절의 나를 키우지 못하고 그가 현재의 나를 휘둘리며 좌지우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되는 꿈」은 제목부터 매혹적이다.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는 게 병이지./22

작품의 할머니가 나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다. 위로 같기도 하고 따끔하게 혼내는 것 같기도 한 말.

엄마의 어두운 방을 생각해도 예전처럼 두렵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엄마의 어둠에서 나를 지우니 어둠은 그저 어둠이 되었다./154.

언제나 나는 엄마의 방에서 나오게 될까. 엄마의 방을 서성이는 어린 나를 데리고 나와야 할텐데. 태희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나쁜 생각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시 버리면 되는 것일까. 더는 말할 필요가 없게 되면 되는 것일까.

올 때만큼 기나긴 길이 남아 있었다.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집에 닿으면 깜깜한 밤일 것이다. 여전히 비가 내릴까? 집은 변함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방에서 똑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잠들겠지. 비 내리는 바다를 봤고 사실을 확인한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잠들 것이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섞인다고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170.

이런 드라마 구조를 좋아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성장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엄마의 방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아마도 나의 성장은 엄마의 방에서 나올 때 완성되고 또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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