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최고의 욕망은 먼지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차피 그 기억이란 이 책에서 쿤데라가 말한 이마골로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괴테의 명성에 기대 불멸을 욕망하는 베티나가 안쓰러웠다. 불멸하는 위대한 작가는 자신의 스캔들 또한 불멸하게 만든다. 베티나의 의도는 적중했으며, 그녀는 괴테의 스캔들 속에서 불멸한다.(이것을 불멸이라 해야하나?)
모든 삶의 장면에서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로라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괴테와 베티나의 이야기 보다 아녜스와 로라의 이야기는 좀 더 현실적이다. 두 자매 이야기는 불멸이라기 보다 기억을 다루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꼈다.(읽으면서 제목을 기억 이라고 해도 괜찮을 뻔 했다고 생각했으나 '불멸'하는 쿤레라님의 작품에 너무 평범한 제목이다.) 몇몇 장면에서 베티나와 로라의 모습이 겹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싶어하는 로라의 욕망은 불멸의 의지로 괴테를 향해 돌진하는 베티나와 같았다.
쿤데라는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방식으로 덧셈법과 뺄셈법을 설명하면서 아녜스와 로라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 냈다.(이 경우 연이은 뺄셈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이 경우 덧붙은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 164.
자아가 0으로 수렴될 위험(혹은 가능성, 혹은 아녜스의 소원?)의 아녜스와 자아의 상실할 수 있는 로라. 이 대조되는 인물을 통해서 쿤데라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녜스에 주목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쿤데라가 그렇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쿤데라는 작품 곳곳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아녜스는 쿤데라가 수영장에서 60대 여인을 보고 만든 인물이다. 작품 후반부 아녜스의 죽음 이후, 쿤데라는 루벤스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다시 한 번 아녜스를 상기시킨다.
아녜스를 따라가다 보면, 기억은 자연발생적인 성격을 갖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각인되고자 욕망하는 로라와 달리, 아녜스는 "시선들의 감미로운 부재(不在)"49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루벤스가 아녜스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아녜스에 대한 해석(판단과 평가 같은 것)이 없다. 아녜스의 몸짓과 그 몸짓이 자아내는 어떤 공기 같은 것이 루벤스가 아녜스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아녜스가 자아를 뺄셈의 방식으로 가꾸는 사람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선의 부재속에서 있고 싶어하는 아녜스는 죽는 순간마저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갖히기를 거부한다.
폴이 도착한다고! 그 순간 그녀는 그가 그녀를 보는 일이 더는 없기를 간절히, 열렬히 빌었다. 그녀는 피곤했고, 어떤 시선도 원치 않았다. 그녀는 폴의 시선을 원치 않았다. 그가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야 했다.429.
아녜스의 죽음은 어찌저찌한 유언으로 "자기를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강요한"34 아버지의 죽음과도 같다. 먼지처럼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는 나는 아녜스의 죽음을 이해하는가. 쿤데라가 이 작품 어디에선가 말했듯 불멸은, 기억은 죽음과 붙어있다.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고 기억되고자 하는 욕망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결국은 죽음으로)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또한 불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읽을 땐 재미있었는데, 정리하려니 뒤죽박죽 생각이 엉킨다. 철학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블랙코메디 같은 분위기도 있다. 몇군데에서는 불경스럽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나오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