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은 책이다. <홀로>라는 단순한 제목이 관심을 끌었다. 바다출판사. 아, <우먼카인드>와 <뉴필로소퍼> 만드는 곳이잖아.
한국 작가들-나보다 어린 연배의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지 않게 되었다. 저마다의 삶에서 얻은 경험과 그 의미를 존중하지만, 결국은 '에세이=신변잡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이 읽었고, 그만 읽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국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을 때는 공부하는 자세가 된다. 이 책도 읽으면서 밑줄을 많이 쳤다. 현재의 고민과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홀로>는 저자가 팬데믹 시대의 우울을 겪으면서 얻은 성찰의 기록이다. 거의 모든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동성애자인 저자가 고립감과 외로움 속에서 '문지방 상태'를 통과하는 기록이다. 문지방 상태란 서구 사회의 세례식이나 견진성사, 결혼식, 장례식 같은 집단적 의례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이전의 정체성을 버리고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 사회적으로 다른 역할을 수용하는 과정...삶의 여러 단계 가운데 한 단계의 끝과 새로운 단계의 시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통과의례에 수반되는 상태...'시간의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순간' '불특정'과 '모호함'의 시간(107)을 말한다. R.S.피터스의 성인식 개념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보다 현재 나의 상태가 이 문장들 곳곳에 고스란히 포개졌다. 사회적 활동이 축소되고 관계가 제한된 상태, 그로 인해 여유와 의기소침이 혼재해 있는 상태, 무엇을 시도해야 할지 무엇을 정리해야 할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 팬데믹 하에서 저자가 느꼈을 혼란한 상태가 현재의 나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고민들에 대해 저자는 용기를 주거나 섣부른 답을 내놓지 않는다. 나는 그저 밑줄을 치면서 읽은 문장을 힌트 삼아 나의 현재를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이다.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판타지와 당연하다 생각했던 많은 상상과의 결별이다.(119)...그래서 나는 판타지들을 계속 품고 가느니 차라리 그것들과 결별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더 의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120)...라고 쓰고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예전에 자신 쓴 판타지 목록이 적힌 종이를 버리려다가 다시 메모장에 끼워 넣는다. 엇, 판타지를 안고 사는 '잔인한 낙관주의'적 삶을 계속한다는 것인가, 잠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다시 읽으며 저자가 과거에 자신을 지탱했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려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반하여 한 때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판타지 메모지는 이제 문지방 저편의 표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감과 확신 대신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자신에게 하는 모든 이야기 사이에는 침묵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또한 그 이야기들이 우리의 관점을 왜곡하고 스스로 감옥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걸 버리려 하는 모든 시도 사이에도 침묵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때 나는, 지금 그런 순간 하나를 경험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엄청나게 개방적인 순간들이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게 가능한 동시에 모든 게 불가능해 보인다. 혼란과 실망, 확신과 무지의 순간인 동시에 알 필요가 없는 순간이며, 때때로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정확히 그 순간에 우리는 삶을 새롭게 쓴다. 195.
삶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어쨌거나 살아가는 것(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닌). 저자의 이런 삶 속에 산책과 정원 가꾸기와 요가와 뜨게질 같은 실질적인 생활의 기술들이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런 실질적 생활의 기술들이 고통 속에서도 발짝을 떼게하는 동력이 되니까.
이 책은 동성애자인 저자가 생각하는 '우정', 곧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로 인해 느끼는 혼란한 마음의 상태와 주목해서 읽었다. 밑줄 친 부분을 다시 한 번 써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자율적 주체란 자신이 확고하게 믿고 있으면서도 모든 이들과 공유하는 진리를 토대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이제 자율적 주체 대신 자기 자신에 의지해 수많은 '작은 서사'안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하는 개인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해 계속 뭔가를 찾고 있는 '자아들'인데, 확신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찾겠다는 소망을 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뭔가를 찾고 있는 자아'라는 그 개념에 일치했다.(22)
한 걸음씩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우리의 사고가 새 궤도를 찾는 것 같다. 육체와 정신과 세계가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나 새로운 대화를 시작한다. 걷기와 경치와 호흡이 이루어져 아주 독특한 사고의 리듬이 생겨나는 것이다.(50)
이 세상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외로움, 사람들에게 인지되지 않는 외로움보다 더 큰 외로움은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한 침묵보다 더 큰 감각상실은 없다.(97)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정서적, 정신적으로 누군가 동행해주기를 갈망한다. 또 누군가 나를 봐주고 인정해주고 이해해주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클라인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은 절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능력도 없고, 그럴 준비로 안 되어 있다. 그런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삶의 핵심적 조건이다...클라인은 이런 판타지가 붕괴되면서, 즉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허구가 무너지면서 외로움의 고통이 생겨난다고 했다. 또한 그 고통은 우리가 믿고 있던 판타지가 실은 허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생겨난 것이다.(100...101)
문지방 상태...하지만 그 시간에는 기회도 제공된다. 멀찍이 떨어져 자신의 삶과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 오랫동안 고민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나 생각할 수 없어던 일들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말이다.(108)
'모호한 손실'...심리학자 폴린 보스한테서 비롯된 이 개념은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상실했는지 모르는 상태의 손실을 가리킨다.(113)
우리는 슬픔이 끝나기를 원한다. 언젠가는 제발 슬픔이 그치기를 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슬퍼하면서 삶을 지속한다. 그리고 다시 슬퍼하고 새롭게 슬러하고 계속 슬퍼한다. 때로는 손실이 너무 모호하기 때문에 슬픔에 끝이 있을 수 없다.(128)
모든 정신적 작업은 육체에서 시작된다...이런 자신의 몸으로 사는 건 어떤지, 우리 몸은 우리에게 어떤 감정 세계를 만들어주는지 등과 같은 내적 경험이다(164...165)
주름살은 내 모든 경험의 표식이었다. 주름살은 나의 경솔했던 행동들과 작년의 모든 심리적 기복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버텨내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된 현실의 흔적이었다. 주름은 내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심지어 주름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176)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될 때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이런 전제로부터 결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