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윤리 1부, 너도 말하라-말하는 주체
거의 모든 면에 밑줄을 치면서 읽고 있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정리하면서 읽고 싶은 생각에 1부 '너도 말하라'의 내용을 요약한다. 거의 밑줄 친 문장을 기록하는 것에 그칠지 모르지만. 질 높은 강의를 들으면서 노트필기 하는 느낌, 그것도 좋다.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을 파울 첼란의 詩 '너도 말하라'의 시어를 가져다 쓰고 있다. 글의 내용도 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다. 독특한 진술이라 여겼다.
1장 말하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sns)
1.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생존 이상의 어떤 것'(22, 24) ...말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말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말은 그저 세 가지 각각 다른 소리로 던져지는 '양배추와 순무' 같은 단어들이 아니다. 그 말은 뜻을 이해시키고자 시도하고,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고자 애쓰는 그런 언어다. 초월과 자유를 표현할 수 있도록 말이 발휘될 때, 기억과 의미가 소통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인간이 된다(25)
무조건 말을 하고, 목소리를 낸다고 인간의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고,
성숙한 언어란 개인적인 경험을 객관화할 수 있는 언어를 말한다. 체험과 분리되지 않은, 즉자적이고 직접적인 소리의 표출은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의 표현일 따름이다.(26)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한 목소리'(Phone)와 '인간이 쓰는 언어' 말(logos)의 구분을 따른다.
2. 말하는 주체
저자는 이어서 로고스를 사용하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적인 것'의 특징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의 활동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활동적일 때 우리가 진정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만이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준다(28).....활동적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
노동: 생명 유지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는 행위/ 작업: 필수품 이상의 것들, 뭔가 더 오래 지속하는 것, 필요의 필연성을 넘어서는 것들을 만드는 행위/ 행위: 물질적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활동.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활동인 행위에는 반드시 언어가 수반된다. 언어 능력은 행위의 필수 조건이다. "말과 행위로 우리는 세계에 참여한다.(30-31)
말 없는 노동과 작업은 가능하다. 반면 행위에는 반드시 말이 필요하다. 인간은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세계에 전달할 수 있다."(33)
행위의 조건은 다원성(plurality), 그리고 다원적 존재들로서 인간의 동등성과 차이(34)
아렌트에 다르면, 말과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 즉 한 개인이 '인간'으로 등장하고 출현하게 되는 공간은 바로 사람들 '사이'(in-between)이다(35)....이 공동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수많은 관점과 입장이 공존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인간적인 의미의 조건이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삶의 의미이다". 공존하는 서로 다른 관점과 다양한 입장들이 공동 세계의 실재성을 보증한다. 관점과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는 말과 행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적당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한다. "이 공간에서 나는 타인에게, 타인은 나에게 현상한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은 다른 유기체나 무기체처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이 현상한다"(35-36)
다시, 아렌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서, 폴리스(polis)와 詩를 언급. 폴리스를 이렇게 해석하네.
폴리스에서 공유된 위대한 말과 행위의 기억은 '시인과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시와 역사를 통해 불멸성을 얻는다(37)
그렇다면, 시와 역사가 말해주는 불멸의 삶은 영웅들의 삶일 뿐인가? NO.
"이야기가 드러내는 주인공은 어떤 영웅적 자질도 필요없다"...불멸성을 획득할 위대함은 용기와 대담성, "기꺼이 행위하고 말하려는 의지"에 달려있다. "용기와 대담성은 사적인 은신처를 떠나 자기가 누구인가를 보여 줄 때, 즉 자아를 개시하거나 노출할 때 이미 현존한다"(40).
3. 말할 수 있는 자격
공적인 언어는 개별자의 모든 경험을, 특히 사적인 경험의 모든 결을 드러낼 수 없다. 내밀한 사적 경험은 공적 언어를 거부한다.(41)...로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만이 사람들 '사이', 즉 공적 공간에 행위 주체로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 출현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도 로고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못하는 자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해야 한다.(41-42)...말하는 사람만이 주권자가 될 수 있다(43).
이쯤에서 저자는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 참여를 보장할 수 없는 집단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경제 정의'를 포함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쥬디스 버틀러를 논의에 끌어온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라는 자각은, 어떤 사적인 관계나 친밀성의 감정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치, 관력관계,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의 공사의 이분법은 두 영역을 오가는 개별 행위자들의 현실을 추상화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46)...버틀러는, 박탈은 공동체 외부로의 추방이 아니라, 내부적 배제라는 점을 강조한다(46)
굶주림에 사로잡히는 과정은 곧 인간으로서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언어는 부서진다...말하기 위해서, 말하는 자리로 가기 위해서 먼저 먹을 수 있어야 한다(49).
그러나 다른 한편 삶은 먹을 것을 넘어서는 잉여의 자리에서 품위를 찾는다...사회적 관계가 (그에게)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적 품격의 상실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먹는 것은 삶, 조에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그러나 먹는 것만으로 가치있는 사회적 삶, 비오스는 충족되지 않는다. 삶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말을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인간적 품위의 조건이 된다(50)
2장 서사 정체성
1. 삶과 이야기의 관계
경험은 이야기되기 위해 선별되어 줄거리로 역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경험은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되어야 한다. 구성은 해석이고 따라서 경험들은 이야기 안에서 때로 과장되거나 미화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52).
미메시스(mimesis): 리쾨르와 아리스토렐레스와 플라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 저자가 미메시스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
경험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내재적인 능력인 '미메시스' 덕분이다. 미메시스는 경험과 언어라는 이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능력이다....리쾨르는 ...미메시스를 '경험의 줄거리로 구성(mythos)하여 묘사하는 언어적 활동'으로 파악한다(56).
텍스트 형상화 이전(경험세계의 이야기적 특징): 우리는 아직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야기가 떠도는 '의미로 가득 찬 세계'안에 경험을 축적하며 살고 있다.(59)...행동을 언어로 묘사하고 재현할 수 있는 이유는 행동이 이미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는 측정 구조, 즉 행동의 의미론, 상징체계, 그리고 시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가의 행동과 실천은 이미 유사 텍스트이다. 그것은 이야기 되기 이전에 이미 이야기이다.
형상화 이후(이야기 읽기): 개별 사건을 하나의 스토리로, 사건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서사적 통일성으로, 에피소드적 시간을 통합된 시간적 전체로 정돈하고 질서 짓고 주체화하는 활동이다. 이 주제화를 통해 개별 사건과 경험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64)....서사 텍스트는 언어적 형상화의 결과물이지만, 그것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은 오직 읽는 행위이다(65)
2. 서사 정체성
인간에게 주어진 그 시간이란 대체 무엇인가?(68)....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는 현재 안에 있다. 어떻게? 그것은 각각 마음의 작용으로 존재한다...과거의 일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일의 현재는 기대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71)
"이야기는 과거의 경험들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나의 '현재의 관심을 중심으로 이야기함' 안에서 구성해 내면서 '나의' 역사를,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한다.(75)
이야기가 나의 경험을 하나의 주제를 가진 줄거리로 엮을 수 있을 때, 그 시간은 나의 시간이 되고 그 경험은 나의 역사가 된다. "인간 실존의 의미는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지배하는 권력일 뿐 아니라, 이야기 담론 속에서 기억되고 회상되는 능력, 잊혀지지 않게 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야기성의 이러한 실존적-역사적 함의들은 매우 멀리까지 미치는데, 그것들은 문화적 의미에서 그 과거와 그 '정체성' 속에서 '보존'되고 '영속화'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를 좇아 리쾨르는 이것은 '서사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고 명명한다...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의 이야기이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시간이 야기하는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간직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고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설명할 있다(76).
스토리를 갖는다는 것은, 일관성 있는 자기 의미를 갖는 것이다(78)
참된 말을 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말하기'에 내재된 규범이다(80)
3. 윤리적 주체화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어떤 개인도 삶을 종합할 줄거리를 선택할 때, 윤리적 가치판단으로부터 초월하여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그 자리는 언제나 이미 윤리적인 자기 평가가 개입된 자리이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서사는 그저 이야기된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해석이며, 모든 해석이 그러하듯 가치 판단을 함축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서사는 곧 자기 평가의 수행이다(82)
어떤 기준에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판단하고 평가하는가?---서사 정체성에 대한 평가는 윤리, 즉 '삶의 목표'에 의거한다. '좋은 삶'이라는 윤리적 목표에 대한 감각이 서사 정체성 구성 및 평가에 작용한다는 것이다...리쾨르는 잠정적이고 보편적이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윤리적 목표'를 "정의로운 제도들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그리고 타인을 위한 '좋은 삶'의 목표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83)
'좋은 삶'이라는 이상에 근거한 행동의 해석과 반성은, 넓은 지평으로 개방되지 않으면 자폐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언제나 매 순간 내 것이 아닌 관점의 매개를 필요로 한다(85)
좋은 삶이라는 윤리적 목표에 '정의로운 제도'가 포함되어야 할 필연성은 '더불어 살기'안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좋은 삶은 단지 개인적인 상호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들로 확대되어야 한다.(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