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다시 읽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역시나 처음 읽는 것 같았고, 그 와중에도 대체 뭐가 뭔지 몰랐던(왜 사람들이 카버를 좋아하는지 몰랐던) 오래전과는 조금 느낌이 달라서 다행스럽긴 했다. 언젠가 부터 책을 읽으면 전체적인 줄거리나 주제보다 어떤 한 장면에 마음이 머문다. 삶이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누구나의 이야기. 그런 사람들이 잠시나마 그 쓸쓸함과 고단함을 위로받는 장면이 나오는 단편들이 좋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생일날 아들을 잃은 부부가 오해가 있었던 빵집 주인에게 금방 구운 빵으로 위로 받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경써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지치고 비통했으나, 빵집 주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집 주인의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을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127-128).
이런 장면은 <열>에도 나온다. 아내가 아이 둘을 남겨둔 채 다른 남자와 떠난 뒤 홀로 남은 칼라일은 어느 하루 두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아이를 돌봐주는 웹스터 부인에게 지난 이야기(주로 아내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자자, 괜찮아요." 웹스터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토닥였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앉아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칼라일은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두통도 여전했고, 자신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그 할머니와 함께 파자마 차림으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게 쑥스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두통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쑥쓰러운 느낌이 멋더니 자신이 어떤 식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좋아요. 잘했어요." 그가 말을 마치는 걸 보고 웹스터 부인이 말했다. "이젠 모든 게 잘 매듭지어졌어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구요. 부인도 말이죠. 그리고 잊지 마세요. 모든 게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걸."....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나침반은-비록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252-254).
이런 잠깐의 관계는 물론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굴레>에서 자신의 힘겨운 삶을 미용사에게 이야기한 베티는 다음날 부터 서먹한 태도를 보인다. <열>에서 웹스터 부인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 않고 계속 아이를 돌봐주었다면 칼라일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장면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비록 잠깐 일테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또 다시 다른 삶의 어려움과 만나게 될테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는 휴식같은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낯모를 사람들의 순한 마음들. <자두>에서의 '단 한번의 친밀함' 같은 시간을 레이먼드 카버의 글에서도 만난다. 이런 순간에 대한 그리움? 혹은 기다림? 때문에 영 딴판인 작가들의 글에서 이런 장면들을 잘 찾아내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됐든 이런 장면들이 하나씩 모여져서 <대성당>의 마지막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경계심을 갖고 있던 맹인과 종이 위에 대성당을 그리며 자신의 경계를 넘은 경험을 하는.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311).
카버의 다른 책들도 찬찬히 읽어봐야 겠다. 올해는 책 읽는 속도를 천천히, 천천히 조절해야 겠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2014.